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생각도감
무능의 권능
2001-11-28

스플래쉬

「시간은 마법사란다, 모든 상처를 잊게 해주니 말이야」

「하지만 흉터는 남아요」

- 헤븐(heaven), V. C 앤드루스 -

바다 건너에서 공부를 하지 않을 때면 즐겁게 드럭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친구 한 녀석은 둘 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면 고맙게도 가끔 연락을 하여준다. 그러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은근한 능선 때는 전화기 앞에 앉아서도 본의 아니게 통화를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목소리가 특정인에 한해서 출입이 자유로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칩거해 있었기 때문에 딱히 더 미안해할 것이 없기는 했다. 뒤에 메일로 당시의 사정을 전해들은 녀석은 어제 처음으로 도자기 파이프를 사용해 봤는데 확실히 인생이 달라졌다는 둥 떠들고 나서는 킬킬 웃으며 뭐야, 그렇게 된 거라니 완전히 인어공주꼴 아니야, 라고 말했다.

2초간 생각해본 뒤 한심한 팔자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카테고리로는 같이 묶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대가리쪽이 생선인 것 같아, 라고 대답했다. 이 나름대로 진지한 대답에 친구는 또 한참이나 킬킬대더니 자, 홀리 콜(Holly Cole)의 노래나 들어보도록 해, 여긴 새벽 세시라 빨리 자야겠어, 라고 말하고는 잠들어버렸다. 나는 가만히 앉아 바닷속에 무엇을 놓고 왔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 정말이지 대표적인 불공정계약이었어. 뭔가 달라고 청원한 적도 없는데 주기는커녕 내 심장을 빼가더니 그 다음에는 목소리까지 빼가버린 것이다. 어딘가 제소해보고 싶었지만 인어인― 대가리쪽이 생선인― 나로서는 뻐끔거리며 바다가 어느 쪽인지 가늠해보는 것이 고작일 테다. 거기에다 군데군데 살점이 뜨여서 견습요리사가 서툴게 회를 뜬 우럭같이 뻐끔뻐끔! 누가 내 위에 깻잎이라도 덮어줘.

오르페우스의 노래에서 유리되는 에우리디케, 톰 행크스가 데리러 오지 않은 대릴 한나. 연인을 물 속에서 숨쉬게 하는 권능이 실린 입맞춤은커녕 혼탁한 슬픔밖에 전하지 못하는 비릿한 물고기가 된 바, 이왕 말라 비틀어질 거라면 실러캔스만한 대형 명태가 되어 세상의 소금인 양 자린고비의 입에 짠맛이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 지느러미를 모아 마녀에게 기원을 올리자.

내 무의미에 무의미를 더하시고,

내 무능에 무능을 보태사 마침내 생의 모든 밑줄을 소거하시는 내 주여,

슬픔에 슬픔을 보태고 한에 한을 더하며 이미 심장에 튼튼히 박힌 대못에도 추가로 망치질을 더하사 구차한 삶 위에 이 미물을 단단히 고정시키시는 내 주여,

목소리 대신으로, 심장 대신으로, 나는 짐승 같은 삶을 원하나이다. 해묵은 절망 같은 삶의 잉여물이 생활을 엄몰하지 말게 하소서. 유리심장은 깨진 지 오래이고 부레 역시 터진 지 오래되었으니, 저 물결에서 더이상 헤엄칠 수 없나이다. 그저 마음 편히 짚풀더미 위를 뒹굴고 오물을 주워먹고 그 위에 토설하며 그 위에 또 뒹굴고 배가 부른 채 잠드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욕망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내게 자비를 베푸소서. 여물통에 베풀어지는 먹이를 먹고 그것만이 하루의 가장 큰 일과가 되기를 원하오며 아무런 사랑도, 아무런 슬픔도, 아무런 고난도 없는 정직한 짐승의 삶을, 극진히 바라옵건대 지느러미가 가는 대로 헤엄치고 죽어서도 수면을 둥둥 떠다닐 수 있는 안위로운 물고기의 삶을. 김현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서식중. 정확한 거처 불명. 키워드는 와일드터키, 에반윌리엄스. <누가 뭐래도 버번은 007이라는 메리트가 있는 것이다!> NEO_HEART_BREAKER@HOTMAIL.COM(하트브레이커는 <하트브레이커스>가 아니라 하트브레이커 ‘더 키드’ 숀마이클님이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