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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인간의 이해, 그 희열의 순간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참 예뻤던 이유

홍상수 감독의 팬으로서 나는 그의 영화가 점점 편안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불편함을 느꼈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이후 솔직히 그의 영화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줄은 예측하기 힘들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를 보고 느낀 감상은 출구가 없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반복과 대구로 이뤄진 그의 영화형식도, 등장인물의 현실과 미래도, 그걸 보는 우리도 지향성을 잃어버린 듯한 심정이었다. 그게 주인공이 끝내 집으로 돌아가는 걸 보여주지 않은 결말 때문인지, 그래서 앞과 뒤가 대구가 맞는 그의 형식적 대칭이 무너졌기 때문인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영화에서 정서적 바닥을 경험한 나는 그 이후의 홍상수 영화에서 꾸준히 상승하는 기분으로 즐겁게 그의 신작에 동참하는 편이다.

감춰진 인간성의 사랑스러운 폭로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특히 그랬다. 자꾸 제목을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다음에 이어지는 여러 말이 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만 떠들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지 말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판관 노릇 하지 말자 등. 아홉 번째 영화에서 홍상수는 그의 영화에 가해지는 상투적인 오해에 대해 점잖게 일갈하는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그러지 말자.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클레르 드니와 홍상수가 대담하는 자리의 진행을 맡은 적이 있었다. 객석에서 또다시 상투적인 질문이 나왔다. “당신의 영화에선 왜 존경할 만한, 본받을 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말 끝에 등장인물에 대한 경멸과 혐오 어쩌고 하는 얘기도 섞여 있었는데 홍상수는 별로 노여워하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예쁘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인간적 결함들, 그것들조차 사랑스럽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의 부대행사로 열린 부산대학교 주최 심포지엄에서 발제를 맡았던 나는 패널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관객이라는 이유로 홍상수의 영화에 도덕적 판관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영화에 이물감을 느끼는 결정적인 이유로 홍상수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드러내는 위선과 욕망 따위를 든다. 수직적으로 내려다보면서 이런 인간들의 행태를 해부하는 감독의 예술적 의지의 정체는 무엇인가를 따진다. 물론 그들은 드라마의 영웅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만큼 우리와 비슷한 레벨에 있는 사람들이다. 수직적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지 않고 수평적으로 그들과 눈높이를 맞출 때 그들은 우리의 감춰진 인간성을 사랑스럽게 폭로하며 넓은 의미의 인간이해와 공감에 도달하게 해주는 인물들이다. 그렇다면 홍상수처럼 그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인터넷에 무자비한 댓글을 달아 누군가를 스스로 죽게 만드는 그런 유형의 폭력에는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때로 홍상수의 영화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나는 무형의 폭력적 기운을 느낀다.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스스로 방치하는 윤리적 방기의 흔적을 드러내기 때문에 오히려 그게 더 무섭고 역겨워지기도 한다.

그들의 낭패에서 우린 웃으며 반성하지

홍상수 영화에 우호적인 사람들은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벌어진 도덕적 결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유머로 받아들인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공공장소에서, 아니면 혼자 있을 때 행하는 짓들을 그의 영화는 거울처럼 비춰 보여준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런 거울을 자기 마음에 장착할 여유가 없다. 그게 자기반영적인 것이든 집단무의식의 어떤 것을 건드리든 간에 대개는 낄낄거리며 받아들이게 되는 흐뭇한 여유가 화면에 묻어 있는 것이다. 나는 홍상수의 신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CGV 극장 체인의 무비콜라쥬라는 예술영화상영관에서 관객과 함께 봤는데(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막론하고 주목할 만한 영화를 한편 골라 한달에 한번 영화를 해설하거나 감독, 배우들과 함께 대화하는 시간을 이동진 기자와 내가 진행하고 있다), 홍상수 영화의 골수팬들인 이들은 희극적 감성으로 영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낄낄거리긴 하지만 그 웃음에는 등장인물에 대한 가학적 태도가 없다. ‘저것들 놀고 있네’라는 심정보다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 불가의 상황에서 인물들이 자기 신념에 의지해 벌이는 행동이 낭패를 보는 꼴로부터 반성적 여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인공 구경남 감독은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가 낭패를 보고 제주도에 특강을 내려갔다가 역시 낭패를 본다. 제천에는 호수가 있고 제주에는 바다가 있다. 두 단락의 마지막에는 호수와 바다가 종결어미 구실을 하는 이미지로 깔린다. 제천에서 구경남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심사는 뒷전이고 술만 진탕 마시게 된다. 한번은 심사위원, 감독, 프로그래머들과 마시고 다음날에는 극장으로 자신을 찾아온 후배의 초청으로 후배 집에서 진탕 마신다. 둘 다 뒤끝이 좋지 않다. 제주도에선 특강을 마친 뒤 학생들과 마시며 때마침 그곳을 찾아온 존경받는 미술가 선배를 만나 마시고 다음날에는 그 선배의 집에 초청받아 이런저런 해프닝에 휘말린다. 두곳에서 모두 구경남은 개망신을 당하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관객 입장에선 모멸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이전에도 홍상수의 영화에 감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이 있었지만 여느 때보다 이 영화에서 김태우가 연기하는 구경남 감독께서는 더 낭패를 본다. 창작과정이 모르는 것에 덤벼들어 발견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믿는 이분께서는 삶과 영화가 그리 분리되지 않는다. 아직 미혼인 그는 어느 곳에서나 민감하게 짝짓기에의 열망으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끼어드는데 언제나 짝짓기의 주인공이 되는 상황을 만들지는 못한다. 구경남이라는 이름처럼 그는 대개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전혀 낭만화시키지 않은 남녀간의 관계묘사는 홍상수 영화의 특징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특히 심하다. 심지어 그는 작심하고 후반부에 누군가에게 대들었다가 기가 막힌 상황에 처한다. 제천에서 아마도 그는 후배 집에 갔을 때 후배의 아내에게 그리 심각하지 않은 흑심을 품었던 것 같다. 술자리에서 후배 부부가 토로한 생활의 자기만족감에 대해 심드렁하게 굴었던 구경남은 후배의 아내에게는 잠깐이지만 진한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그날 후배 집에서 잔 그의 꿈에서 그런 그의 심정이 드러난다). 제주도에선 아예 격정의 로맨스 주인공이 되려고 했지만 역시 허망하게 끝난다. 치정극의 주인공처럼 그는 초라하게 주변 이웃들의 개입으로 쫓겨난다.

엔딩신에서 말문이 막혔어

그런데 고현정이 연기한 제주도 여인은 구경남과 다르게 치정극의 주인공처럼 초라하게 굴지 않는다. 구경남이 코언 형제의 <바톤 핑크>의 희곡작가처럼 겉으로 하는 말과 달리 세계의 비밀을 다 아는 듯한 오만한 창작자의 심정으로 현실의 남녀관계를 경영하려다 큰코다친다면 고현정 버전의 고순이라는 여인은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여주인공 모드처럼 피상적인 도덕률 따위는 안중에 없는 진짜 자유주의자다.

물론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 모두 우리가 그렇듯이 각자의 인식의 감옥에 갇혀 저마다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중생들이지만 조금씩 레벨이 다르고 그중 고순은 가장 고수다. 그녀가 아직 사태 파악이 안된 구경남에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핀잔을 주는 장면은 아름답다. 그 말 한마디로 아직, 그리고 오래도록 발견하는 과정 중에 있을 구경남의 말문은 막힌다. 카메라가 옆으로 이동하면 바다가 펼쳐져 있다. 말문이 막히는 엔딩신이었다. 인간의 이해, 세상의 이해를 말로 떠드는 것보다 몸으로 알아가는 어떤 고양의 희열이 이 순간에 있었다. 모든 홍상수 영화가 그렇듯이. 나는 이 영화가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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