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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형의 아저씨의 맛] 님하, 눈치 좀

존중받는 나이듦에 대한 일고찰

얼마 전 ‘아저씨’한테서 문자가 왔다. 저녁때 약속있냐. 약속은 없지만 일이 많아서. 답장했다. 누구누구누구 보는데 시간있음 와라. 상황 봐서 연락드리겠슴다. 저녁에 전화가 왔다. 다 모였는데 잠깐이라도 와라. 어려울 거 같은데, 끝나면 연락드리죠. 이후 한 시간 간격으로 오는 문자. 아직도 안 끝났냐. 잠깐만 들러라. 블라블라블라.

아무리 아저씨를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그래서 현미경으로 잡아내도 한두 가닥 잡힐까 말까 하는 아저씨의 미덕들을 불철주야 뒤져도 결정적으로 아저씨에게 정붙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귓구멍이 막힌 거냐? 눈치 좀 보고 살아라. 이것들아.

내 생각에 대한민국 아저씨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처지는 뱃살도, 물수건으로 겨드랑이 닦는 매너도, 처음 본 사람에게 반말 찍찍 내갈기는 권위주의도 아니다. 눈치가 없다는 것이다. 남자의 사회화 과정에 대해서 장황하게 쓸 생각은 없다. 다만 관찰한 바에 의하면 남자들의 상당수는 청년 시절의 수줍음이나 두려움 등을 상실해가면서 커뮤니케이션 능력마저 현저히 떨어져간다. 청년 시절에는 ‘제가 좀 바빠서’라는 대답에 ‘내가 싫은가?’ ‘나한테 입냄새가 나나?’ 백 가지 고민을 하던 남자가 아저씨가 되면 이렇게 반문한다. 왜 바빠? 뭐하는데? ‘너 때문에 지금 막 바빠졌어’라는 뉘앙스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병세는 갈수록 악화되는데 그들의 늙음을 존중해주느라 응대는 점점 더 에둘러 온건해지고 그러면서 점점 더 눈치를 못 보는 상황이 순환되기 때문이다.

그 악순환이 최고조에 이르면 바로 요즘같이 놀아주는 사람 하나 없어 점심도 도시락시켜 혼자 사무실에서 먹는다는 그분, 눈치없음이 신념을 넘어 과대망상으로까지 발전해가는 그분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법원행정이니, 사법지휘권이니 하는 논란을 떠나서 무슨 일이건 내가 한 행동에 대해 멀쩡히 일 잘하는 후배나 동료들이 이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라고 하면 아닌 거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선배님, 실수하셨어요’라고 하는 말에 화들짝 놀라는 게 정상이다. 아랫사람의 ‘오늘 좀 바빠서’라는 말에 ‘나 오늘 너랑 진짜 놀고 싶지 않다’라는 뜻이 있는 것처럼 ‘실수하신 거다’라는 말에는 ‘웬만한 실수는 그냥 넘어갔지만 이번 건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잘못이다’라는 뜻이 있는 것이다. 거기서 눈치없이 버티거나 ‘애교로 봐줘’라고 반응하면 벽에 똥칠하기 직전 치매 노인되는 거다.

눈치없는 것들은 옆사람만 답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세상을 답답하게 한다. 점잖게 나이 먹고, 품위있는 아저씨가 될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체력관리도, 재산관리도 아니다. 눈치있게 살아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