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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프랑스 혁명에서 2009년 한국을 보다
장영엽 2009-06-11

<마라, 사드>/6월14일까지/세종M씨어터/02-396-3406

대사 전달 지수 ★★☆ 현실 상기 지수 ★★★★★

장 폴 마라. 18세기 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피의 혁명이 불가피하다 믿었던 급진주의자, 반대파 여성의 칼에 맞아 욕조에서 생을 달리한 비운의 남자. 마르키 드 사드. 개인의 자유의지와 욕망이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한다고 믿었던 18세기 말 프랑스의 개인주의자, 성도착적인 소설을 써 구설수에 오르고, 반혁명 혐의로 감옥을 드나들던 소설가, 필화 사건으로 정신병원에 갇혀 생을 마친 비운의 남자.

<마라, 사드>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지만 교차점이 전혀 없었던 이 두 남자를 한 공간에 올려 세운 연극이다. 원작자 페터 바이스는 1793년 마라가 코르데라는 여성에게 암살당했을 때 사드가 추모연설을 맡은 점에 착안해 두 사람의 가상 대결을 구상했다고 한다. 연극의 배경은 1808년, 사드가 감금된 정신병원이다. 그곳의 수감자들을 배우로 삼아 희곡을 쓰던 사드는 15년 전 죽은 마라를 연극을 통해 되살려낸다. 그리고는 연극에 직접 개입해 마라와 혁명을 주제로 한판 논쟁을 벌인다.

두 지성인의 만남은 과연 화려하고 날카로운 수식어로 가득하다. 본인의 실제 저서에서 인용되었다는 마라의 대사는 현학적이면서도 통렬하고, 개인주의자다운 사드의 대사는 이성적이고도 냉철하다. 하지만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그들의 대사를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의미 전달이 목적이 아니라는 양 정신병자 배우들의 광기가 극의 전개를 끊고, 그들을 저지하려는 병원 직원의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이러한 장치 때문에 극에 몰입하려던 관객은 자꾸만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의도적인 설정으로 보인다. 연출자는 과거 이역만리 외국에서 벌어졌던 국가와 개인에 대한 논쟁을 2009년 한국으로 소환하려는 듯하다. 종종 등장해 시니컬한 멘트를 날리는 해설자는 자꾸만 ‘지금, 여기’의 상황을 직시하라 말한다.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개개인은 단결해야 하는가, 부패한 자들을 강제로 몰아내는 것은 정당한가. 그 뒤에는 어떤 대안이 존재하나. 18세기 프랑스의 고민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으로 남아 있다.

국내 최초로 상연되는 <마라, 사드>의 연출은 박근형이, 주연은 김주완(마라)과 강신구(사드)가 맡았다. 사드쪽으로 에너지가 치우치는 것이 다소 아쉽지만, 몇몇 장면- 마라가 정신병자들에게 세례처럼 머리에 물을 받는 장면, 무대가 피처럼 붉게 물들어가는 마라 암살 장면, 광기의 파티가 벌어지는 마지막 장면- 의 연출은 매우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