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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부해도 좋아
2001-11-29

<위저드 앤 워리어>

다른 엔터테인먼트 산업들도 다 그렇지만, 게임을 만드는 데 새로운 아이디어는 대단히 중요하다. 화려한 그래픽이나 뛰어난 인공지능을 갖추려면 많은 돈과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지만, 그런 것 없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얼마든지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리듬액션게임이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비트 매니아> 등도 사실 기술적으로 따지면야 대단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참신한 아이디어로 오락실을 휩쓸었다. 그렇지만 아이디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국내에 출시된 걸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위저드 앤 워리어>라는 게임이 있다. 올드 게이머라면 최고의 롤플레잉게임 중 하나로 꼽는 <위저드리> 시리즈의 5편에서 7편까지의 디자인을 맡았던 D. W. 브래들리가 디자인한 게임이다.

<위저드 앤 워리어>는 이른바 ‘정통’ 미국식 롤플레잉게임이다.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건 캐릭터 작성이다. 종족과 성별, 직업이 다른 여러 캐릭터를 만든다. 주막에서 함께 떠날 캐릭터들을 모아 파티를 편성하면 모험이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걸다보면 이것저것 해달라는 일들이 있다. 마법사, 전사, 승려, 도둑의 가장 전형적인 4인 파티 이상이 아니면 해결하기 힘든 일이 많다. 다양한 퀘스트를 처리하다보면 경험치가 쌓이고 돈도 모인다. 전사라면 검술, 도둑이라면 자물쇠 해체 등 직업에 걸맞은 기술을 수련하려면 길드에 가입하는 게 지름길이다. 어느 정도 레벨이 올라가면 다른 직업으로 전직할 수도 있다.

이름부터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는 <위저드 앤 워리어>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라고는 없다. 시스템은 벌써 수십년간 구축된 전형적인 미국 롤플레잉게임 스타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느닷없이 당신은 ‘선택된 자’라며 악의 힘으로부터 세상을 구하라고 종용하는 마을 촌장을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그 밖에도 신성한 오라클을 지키는 할머니 무녀 삼총사, 지하무덤에 숨어 위험한 실험을 하다가 몬스터가 되어버린 정신나간 악당, 묘지에는 해골, 숲에는 트롤 등 전형적인 적들, 겹치기 출연하는 등장인물은 전부 헤아리기도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게임을 붙잡으면 손에서 뗄 수가 없다. 하나만 더, 꼭 하나만 더, 자꾸자꾸 퀘스트를 해결하다보면 캐릭터들 레벨이 올라가는 게 너무 자랑스러워서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이라도 하나 두고 하고 싶을 정도다. 중요한 퀘스트를 해결하면 지금까지 갈 수 없던 곳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그걸 보며 구태의연한 단선 진행에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모험에 대한 기대로 두근두근해진다.

<위저드 앤 워리어>는 권위있는 외국 게임잡지들에서 별로 좋지 않은 평점을 받았다. ‘게임 스팟’에서는 10점 만점에 7.2점, 영국의 ‘PC존’에서는 겨우 5점이다. 게임 디자이너의 유명세에 비하면 정말 형편없는 점수다. 악평의 이유는 한결같다. 이런 낡은 게임 시스템, 시대에 뒤떨어진 롤플레잉게임에 시간을 투자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말한다.

괸 물은 썩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아무리 훌륭한 시스템이라도, 거기에 안주하면 붕괴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시도되지 않으면 게임의 미래는 없다. 하지만 <위저드 앤 워리어>는 재미있다. 구태의연한 시스템이 너무나 원숙한 솜씨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유행하는 새로운 시스템으로 옮겨다니기에 바빠 진득하게 숙성되지 못한 어설픈 아이디어게임에서는 볼 수 없는 맛이다. 이 정도 게임이라면 진부함 정도야 못 본 척해줄 수 있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