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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영화] 남 신경 쓸 필요없어
김중혁(작가) 2009-07-09

<걸어도 걸어도> 속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보며 어떻게 살지 생각하다

* <걸어도 걸어도>의,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본 경험은 지난해 겨울 유럽에서의 석달이 전부였지만 지난주 김연수씨의 충고는 깊이 새겨둘 만하다. 외국으로 여행 갔을 때 정색하면 지는 거다. 어떻게든 웃으면서 즐겨야 하고,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당황하거나 외로워하거나 허둥지둥하면 지는 거다.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정색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가끔은 당황하거나 외로워하거나 허둥지둥하는 게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이 꼬였는데 말은 통하지 않을 때 느끼는 막막함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여행 준비를 할 때마다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을 챙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로울 때 듣기 위해서다. 영국 리버풀의 사람들 틈에 끼어 비틀스를 듣는다면 어떨까, 추운 북극의 나라에 가서 시규어로스의 살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 브리스톨에 가서 포티셰드의 베스 기븐스 목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전세계의 음악을 챙기게 된다.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모든 장르의 음악을 챙겨간다. 그런데 막상 외국에 나가면 음악을 듣는 일은 거의 없다. 여행을 하면 언제나 귀를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도시에는 각각의 독특한 소리가 있어서 그 소리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나는 비엔나를 생각하면 트램 지나가는 소리와 횡단보도의 째깍째깍하던 경보음이 떠오른다. 런던을 생각하면 템스 강 위로 보트가 지나가던 소리가 떠오른다. 로마는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떠오르고, 스톡홀름은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유독 생생하다. 당연히 저마다 기억하는 소리가 모두 다르다. 정답이 있을 리 없다. 소리를 떠올리면 풍경이 살아나고 풍경이 살아나면 감정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나는 가끔 소리를 녹음해 오기도 한다. MP3플레이어에다 넣어두고 가끔 도시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도시가 생각난다.

소리의 기억을 통한 여행의 즐거움

아주 가끔은 준비해간 음악을 듣는 경우도 있다. 기차를 탔는데 목적지가 종착역일 때 (그래서 기차 방송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 배를 탔는데 목적지까지 열 시간 이상 걸릴 때 (배 구경을 다 하고도 여섯 시간 이상 남았을 때) 가끔 음악을 듣는다. 바깥의 낯설지만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든 게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듣는 음악은 귀가 아니라 심장에다 이어폰을 꽂은 것처럼 온몸을 뒤흔든다. 그럴 때는 비틀스도 좋고, 바흐도 좋고, 시규어로스도 좋겠지만, 우리말 가사가 있는 ‘유행가’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한줄 한줄 가사에 밑줄이 그어지고, 모든 말이 시처럼 느껴진다. 한국말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모든 단어와 조사와 표현이 새롭다. 몇 시간 전에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사랑 이야기에 가슴이 아프다. 지난 겨울 유럽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김범수의 <슬픔활용법>이다. ‘그때처럼 웃어본 적 없어, 세상이 마냥 좋은 적 없었어’라는 가사만 들으면 어쩐지 울컥, 하면서 모든 게 그리워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상이란 여행에서만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게 아닐까. 요즘도 <슬픔활용법>을 들으면 그때가 생각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제목은 1970년대에 히트했던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중요한 부속품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가 몰래 불렀던 노래이며, 어머니가 숨어서 들었던 노래다. 아버지는 며느리 앞에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한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비틀스와 마일스 데이비스까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힙합은 음악도 아니라고 평가한다. 음악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는 대목은 병원 원장이었던 아버지의 허세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집에서는 병원 원장의 체면 때문에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지도 않고, 빨래도 빳빳하게 널지 않게 구겨버리는 성격이지만 다른 여자 앞에서는 사랑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세울 때는 클래식이나 마일스 데이비스가 좋지만 정작 사랑받고 싶을 때는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부르는 아버지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아버지의 길티 플레저였던 셈이다.

사라진 계단을 마지막 화면으로 했더라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쓸쓸하다. 어머니의 삶도 아버지의 삶도 쓸쓸하다. 아버지가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아무 데서나 부르고 다녔으면 어땠을까. 병원 원장이어도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좋아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모든 일에 화를 냈으면 어땠을까. 혼자서 몰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듣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따졌으면 어땠을까. 그러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는 바꾸거나 옮길 수 없는 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모든 장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마지막 몇 장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아마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 끝냈을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라진 계단을 마지막 화면으로 남겨두고 영화를 끝냈을 것 같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이야기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을 잊고 있으니까. 두 사람을 남겨두고 우리는 잘 살고 있으니까. 인간은 역시, 상대방을 배려하기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인 동물이다. 타일을 고쳐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곤 낮잠만 자다 간 사위처럼 ‘1년에 한번만 찾아와도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아들처럼, 모두들 제 생각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남 신경 쓸 필요없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마음에 든다면 마음껏 불러야 하고, 싫으면 싫다고 소리질러야 하고, 상처를 받았으면 따져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러나, 정말,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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