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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찾아낸 풍경] 로케이션 아카이브 구축을 제안함

연재를 마치며- “장소헌팅은 영화의 생기를 책임지는 부분”

CF 장소 물색을 위해 김제벌판을 가던 중 우연히 찾게 된 마을. 1980, 90년대 우리나라 모습이 남아 있다.

수년간 영화와 CF에서 필요로 하는 장소를 찾아 전국을 다녔다. 사진을 찍고, 촬영을 이끌어내고, 사진을 분류하고 좋은 테이터를 선별했다. 이 작업만 벌써 8년째다. 한국의 모든 해변마을과 제주도의 모든 해변, 촬영할 만한 모든 산, 촬영을 허가해줄 만한 서울의 거의 모든 옥상들을 올라가봤다.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이러한 소중한 정보와 경험들을 바탕으로 지난 6개월 동안 ‘기어코 찾아낸 풍경’이란 칼럼을 통해 좀더 유익한 정보를 주려고 했지만 그 또한 녹록지 않다는 걸 한달에 두번씩은 느껴왔다. 글쓰기란 남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리는 수단이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이것은 본인에게도 중차대한 일이었다. 부족한 글이었지만 최선을 다해 반년을 보냈다. 아쉽지만 이 글이 칼럼의 마지막 원고다. 이번에는 로케이션 헌팅의 효율적인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영화쪽 헌팅도 전문가에게 맡겨야

현재 영화계와 CF 그리고 드라마를 통틀어 로케이션매니저로서 활동하는 이는 50명 남짓이다. 특히 CF와 드라마에서는 로케이션매니저들의 활동이 일반적인 스탭 구성원으로 정착돼 있고, 그 인프라도 어느 정도 확고하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아직 로케이션매니저나 로케이션회사에 헌팅을 맡기는 경우가 많지 않다. 과거부터 그래왔듯이 제작부 인력들이 수개월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헌팅을 하고 현장진행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변하거나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비용 등 모든 것을 고려해볼 때 영화 헌팅의 방식도 조금씩 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영화가 필요로 하는 로케이션 장소는 ‘질 좋은 종이’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머릿속에서 글로 그려진 상상의 산물이 현실에 상륙하는 지점이 바로 로케이션이다. 그만큼 영화의 생기를 책임지는 부분이다. 좋은 장소는 연출가에게 영감을 주고, 미술감독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며, 거기에 빛(조명)을 줌으로써 생명을 얻고, 마지막으로 렌즈는 이 모든 것을 빨아들여 필름에 기록한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의 원천이 ‘질 좋은 하얀 백지’와도 같은 상태의 좋은 로케이션일 수밖에. 또한 나타내고자 하는 인물의 동선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장소여야 하고, 주변의 소음까지도 체크를 해야 하고, 그 공간의 이면에 있을 촬영 스탭들의 공간 또한 장소를 선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어떤 장면을 밤에 촬영해야 한다면 조명 크레인의 접근이 가능한지도 사전에 체크해야 한다.

그만큼 로케이션 헌팅은 힘들다. 물론 힘든 만큼 보람도 있다. 나는 지금도 첫 로케이션 헌팅을 해냈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여전히 그곳이 나에게는 최고의 로케이션 장소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면 도전리의 작은 계곡이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근방 사람들만 찾아가는 소박하고 깨끗한 곳이다. 이름하여 부수베리계곡.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듯한 물들이 작은 폭포를 이루고 있고, 폭포 앞에는 작은 소(沼)가 있어 아담한 선경을 만들어낸다.

8년 전,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형 프라이드로 험한 비포장길을 달리며 헌팅을 하던 때였다. 당시 나는 화장품 CF의 로케이션 의뢰를 받고서는 눈앞이 캄캄했다. 작은 폭포가 있어야 하고 그 앞에 ‘소’가 있어야 했으며, 바로 옆까지 장비차가 들어갈 곳이어야만 했다. 전국의 유명한 계곡과 산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지만 도무지 적절한 곳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때 평소 산을 좋아하시던 큰누님이 이 계곡을 알려주셨다. 촬영 당일 그곳을 찾아온 모든 스탭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오랜 작업으로 누적된 피로가 한순간에 싸악 가시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도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더 멋진 곳도 찾아봤다. 하지만 처음의 그 순간처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전국 돌며 찍은 사진만도 65만여컷

이렇게 찾아다니며 촬영했던 사진이 65만여컷에 이른다. 전국의 사찰과 오래된 건물, 시골마을의 작은 돌담길, 바다를 내려다보는 청보리밭의 위치와 해가 지는 방향 등 굳이 촬영을 위한 정보가 아니더라도 기록했다.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하는 가치있는 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했다. 또한 향후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라 여겼다.

이렇게 모인 정보를 바탕으로 로케이션 아카이브구축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문화체육관광부,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지역의 영상위원회들이 힘을 합한다면 좀더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영화작업들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지역 골목골목의 스타일과 도로의 형태, 건물의 형태, 그 지역의 특성 등을 비교하며 볼 수 있다면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지 않을까? 물론 이렇게 편리한 디지털 시스템도 많은 인력의 아날로그적인 작업이 뒷받침되어야 빛을 발할 것이다. 지금 당장 100%의 시스템을 만든다고 생각지 말고 향후 10여년간 노력을 기울인다는 다짐을 하고 시작한다면 앞으로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은 커다란 소득을 얻게 될 것이다. 발품을 팔아가며 얻었던 감동이 또 다른 기쁨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동안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