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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영화 74편 올가이드 [2]
김혜리 2001-11-30

공공의 적

진짜 나쁜 놈은 따로 있다. <투캅스>에 나오는, 업소 돌면서 관리비 뜯는 경찰관에 대한 강우석 감독의 애정은 그런 것이었다. 적당히 때묻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태도로 임하는 <투캅스>의 안성기를 누가 비난할 수 있겠는가. 양심에 어긋하는 일에 몸서리치던 패기만만한 젊은 형사 박중훈도 결국은 안성기의 전철을 밟고 말았다. 강우석 감독이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이후 3년 만에 연출하는 작품 <공공의 적>에 등장하는 형사 철중도 그런 인물이다. 사소한 불법은 거리낌없이 눈감을 줄 아는 이 남자가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이유를 법의 잣대로 가늠할 수는 없다. 그는 진짜 나쁜 놈을 만난다. 이름하여 ‘공공의 적’. 먼지 한올 떨어지지 않은 말끔한 양복에 흐트러짐 없이 빗어넘긴 머리를 한 펀드매니저에게 철중은 무턱대고 덤벼든다. 그가 자기 부모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철중에겐 증거도 증인도 없지만 분노와 투지는 넘쳐난다. 과연 철중은 진범을 잡을 수 있을까? <공공의 적>은 살인범과 형사의 대결을 그린 액션영화이다. 얼핏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연상할 수 있지만 강우석 감독의 스타일은 이명세 감독보다 투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하다. 그는 연출의 변으로 “흥행과 완성도의 두 마리 토끼를 쫓기보다 손색없는 상업영화로 재미를 전달했으면 좋겠다”고 밝혔지만 영화를 찍어가면서 완성도에 대한 자신감이 늘어가는 눈치이다. 다른 영화를 만들 때와 달리 외부인사를 편집실로 불러 미리 러시필름을 보여주며 입소문을 기대할 정도다. 애초 <공공의 적>은 쿠앤필름에서 기획했다 강우석 감독의 눈에 띄었는데 <투캅스> 시리즈의 감독으로서 애정을 가질 만한 요소는 충분하다. 사실적인 액션과 코미디가 조화롭게 살아나자면 두 주연배우의 카리스마가 결정적이다. 설경구는 몸무게를 10Kg 이상 불리면서 험악한 형사의 모습을 만들었고 <신라의 달밤>에서 깔끔한 조폭 보스로 등장했던 이성재는 곱상한 외모에 숨은 병적인 악마성을 보여줄 예정.

나쁜 남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가 매진을 기록하자 제작사인 LJ필름은 김기덕 최고의 흥행작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결과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나쁜 남자>가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 지점은 분명히 있다. <섬>이나 <수취인불명>에 비해 정서적 반발을 불러일으킬 장면이 줄었다는 점. 그렇다고 김기덕 감독이 변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쁜 남자>는 김기덕 영화의 핵심적 요소를 좀더 선명히 보여준다. ‘<악어>의 용패가 <파란 대문>의 진아를 만났을 때’라는 부제를 붙여도 좋을 만큼 김기덕의 색채는 강렬하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에 대한 김기덕식 번안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9 로스트 메모리즈

2009년, 한국은 없다. 20세기 초 조국을 찾으려는 한 애국청년의 거사가 미래에서 찾아온 일본인에 의해 좌절되고, 역사는 뒤틀린다.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권은 여전히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아래 놓여 있으며 서울은 일본제국의 제3도시일 뿐이다. 매끄러워만 보이는 이 제국에게도 하나의 골칫거리가 있으니, 그것은 후레이센진(不令鮮人)이라는 이름의 테러집단이다. 일본제국의 거대한 막후세력인 이노우에 재단이 주최하고 정계의 거물들이 일제히 참석하는 유물 전시회를 이들이 놓칠 리 없다. 후레이센진의 침입으로 아수라장이 된 전시회장에는 일본의 특수수사기관 JBI 소속 사카모토 요원과 사이고 요원이 투입된다. 이 사건에서 심상치 않은 음모의 냄새를 맡은 사카모토는 심층 수사를 시도하지만, 조직의 상부는 그가 조선계라는 이유로 제동을 건다. 정직처분을 받은 뒤로도 계속 수사를 진행하던 그는 동료 경찰을 살해했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오히려 동료들에게 쫓기게 된 사카모토는 결국 후레이센진의 아지트에서 오혜린이라는 조선 여성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한국과 일본, 중국을 오가며 로케이션을 진행한 이 영화에서 우선 눈에 띄는 점은 ‘블록버스터’적 요소다. 순제작비 63억원이 들어간 영화답게 총기액션부터 자동차 추격장면까지 스케일 크며 화려한 갖가지 액션이 펼쳐진다. 모두 38개의 신축 세트 중 이토회관 세트에는 3억원 가까이 들었을 정도로 볼거리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의 장점으로 꼽히는 것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 가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녹이는 <…로스트 메모리즈>는 미스터리와 스릴러적인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보는 이의 숨을 가쁘게 한다. 제작사와 투자사로부터 “그 친구 정말 여우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완숙한 연출력을 인정받는 이시명 감독의 데뷔작. 다소 민족주의적 냄새가 짙은 이 영화가 지향하는 바는 한국판 <인디펜던스 데이>라고 한다.

화산고

그 고등학교에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화산고라는 가상의 학교를 배경으로 학생과 교사들의 대격전을 그리는 <화산고>는 일종의 판타지 액션영화. 이곳 학생들은 찻잎을 용 모양으로 공중에 띄운다든지, 날아오는 분필을 눈앞에 딱 멈춰놓는다든가 하는 기술은 우습게 여길 정도로 뛰어난 무공의 소유자들. 걸핏하면 하늘을 붕붕 날며 격투를 벌이는 등 만화를 능가하는 상상력을 스크린에 옮겨놓으려다 보니 상당수의 액션장면은 와이어액션으로 이뤄졌다. 국내 기술진에 의해 시도된 이 영화의 와이어액션은 홍콩의 그것과 자못 다를 것이라고 제작진은 설명한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사용된 컴퓨터그래픽 또한 핵심적인 요소. 필름 전체를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한 뒤 대대적인 CG 작업을 하고, 필름으로 다시 옮기기 전 컴퓨터로 전체적인 톤을 맞추는 디지털 색보정까지 거쳤다. 주인공은 무시무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경수(장혁). 화산고로 전학온 그가 학교 내의 건달패거리, 학생을 통제하기 위해 특별히 고용된 학원가 출신 교사들과 ‘맞짱’을 뜨는 이야기를 경쾌하고 빠른 속도로 그린다. 경수와 채이(신민아)의 상큼한 첫사랑은 이 영화의 또다른 축이다. <박봉곤 가출사건> <키스할까요> 등을 만든 김태균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무려 11개월에 걸쳐 촬영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집으로…

태어난 이후 7년 내내 서울의 콘크리트 바닥과 잿빛 하늘에 안겨 지냈던 상우. 혼자 그를 키우던 엄마는 사정이 어려워져 상우를 외할머니집에 맡긴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은 파란 하늘과 초록빛 자연이 일렁이고 있지만, 상우에게 이곳은 TV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프라이드 치킨도 먹을 수 없는 ‘오지’일 뿐이다. 게다가 말까지 하지 못하는 할머니와 소통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며 동네 친구들도, 여자아이 하나를 빼놓곤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머니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는, 최소한 한국인에겐 각별하다. 할머니로부터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던 따스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뇌세포의 어딘가에는 상우처럼 어린 시절 할머니를 마구 대했던, 잊고 싶은 기억도 남겨져 있다. <집으로…>는 꼬마아이 상우를 통해 우리의 할머니에 대한 ‘모든’ 기억을 뒤지게 하는 영화다. 게임기의 배터리를 구하기 위해 할머니의 비녀를 팔아먹으려다, 숟가락을 머리에 꽂은 채 자신을 찾아나선 할머니와 만나게 되는 상우의 모습에서 어쩌면 스스로를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충북 영동의 산골에서 촬영되는 이 영화는 ‘진짜 할머니’의 연기 아닌 연기와 그 어떤 세트장도 보여줄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기대하게 한다.

파라다이스 빌라

파라다이스 빌라라는 연립주택은 겉으론 서민들의 조그맣고 평안한 보금자리로 보이지만, 그 안에는 끈적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 있다. 옥탑방을 10대 소녀에게 내주고 정기적인 섹스를 즐기는 주인집 남자를 비롯해 이웃 몰래 불륜의 싹을 키우고 있는 펀드매니저와 피아노 강사,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을 해킹하거나 몰래카메라를 찍어 용돈을 벌고 있는 주인집 아들, 이웃들에게 정수기를 팔기 위해서라면 공동 물탱크에 흙을 집어넣는 일도 마다지 않는 새댁 등이 그들. 어느날 주인집 아들에게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을 도둑맞은 한 소년이 보복을 위해 이 빌라를 찾으면서 불안했던 평화가 깨지고, 이곳은 삽시간에 핏물로 철철 넘쳐흐르게 된다. “제한없이 분출되는 인간의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 했다”는 것이 박종원 감독의 이야기.

센터 오브 더 월드

닷컴기업의 성공으로 백만장자가 된 남자에게 세상의 중심은 바로 PC로 이어지는 네트워크다. 이를 통해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 반면 한 밴드의 드러머이기도 한 스트립걸에게 세상의 중심은 자궁이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거쳐갈 수밖에 없는 자궁을 통해 수많은 남성들과 교류를 갖는다. 폴 오스터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고, 웨인왕이 감독한 <센터 오브 더 월드>가 관심을 갖는 주제는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남녀의 커뮤니케이션이다. 각자 소통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서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는 하나다. 껍데기를 벗은,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과 마음이 직접적으로 교접하는 것 말이다. 이 닷컴 황제와 스트립걸의 사흘 동안의 라스베이거스 여행기는 자극적이고 관능적으로 시작하지만, 끝내 돈과 육체라는 서로의 ‘밑천’을 포기하면서 벌거벗은 채 마무리된다. 싱겁기도 하지만, 동화를 읽은 듯한 포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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