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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노래방과 정태춘
이영진 2009-07-24

1. 노래방에 출근 도장 찍던 때가 있었다. 머리 굵어진 후배들이 노래방 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떼놓고(?) 혼자 갔다. 지금도 술이 취한 상태로 곯아떨어지면 이튿날 숙취 해소가 어려운 체질이다. 그때도 그랬다. 술자리가 길어질 경우, 중간에 노래방에 들러 조금이라도 의식을 되찾아야 했다. 당시 자주 갔던 곳은 S동 K노래방이었다. 싱글들을 위한 배려가 돋보이는 곳이었다. 최신식 노래방은 아니었지만, 혼자 놀기 좋은 아담한 사이즈의 룸들을 완비하고 있었다. 마이크 에코도 적절했으며 소파도 깨끗한 편이었다. 다만 노래방 주인장의 의심을 불식시키기엔 꽤 시간이 걸렸다. 일행 없이 혼자 왔다고 했을 때 주인장의 반응은 이랬다. “아가씨 안 나옵니다. 정말 안 나옵니다. 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주인장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난 1주일에 한번은 노래방에 들러 가창에 정진했다.

2. 1992년 5월. 광주 시내에도 노래방이 하나둘 생겨났다. 부산과 서울을 거쳐 광주에 유입된 노래방 기기들은 대부분 A사에서 만든 것이었다. 참으로 저렴한 컴퓨터 반주가 특징이었다. 당시 재수생이었던 나는 오전에 잠깐 학원에 들러서 가방을 맡긴 뒤 도시락을 까먹고 오후에는 노래방에서 놀았다. 이 무렵 대학 진학만큼이나 중요했던 목표가 정태춘 모창이었다. 누구는 레드 제플린을 듣고, 누구는 김현식을 꼽던 시절, 나한테 가수는 정태춘 한명이었다. 정태춘의 존재를 알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곱슬머리에, 새까만 얼굴에, 두개골 마사지가 특기였던 친구 K가 쉬는 시간에 <촛불>을 부르는 것을 들은 뒤였다. 또 다른 친구 S가 레코드점에서 복사해준 정태춘 짜깁기 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들었고, 그 뒤 어느 목욕탕에서 내가 정태춘 모창에 재주가 있음을 얼핏 깨달았던 것 같다. 정태춘 모창을 주변에서 인정받기까지 10년 정도 걸린 듯한데, 그동안 노래방에서 나는 <떠나가는 배>를 몇번이나 불렀을까.

3. 내 꿈은 정태춘을 인터뷰한 다음 그 앞에서 그의 노래를 부른 뒤 평가를 듣는 것이다. 물론 아직은 멀었다. 노래방에서 갈고닦은 모창 실력으로는 비웃음을 살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 노래방의 후진적인 시스템 또한 나의 꿈을 더디게 만들었다.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한국의 노래방에서 표현의 자유는 요원하다. 정태춘은 노래방에서 여전히 불온한 가수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92년, 장마 종로에서>에 실린 명곡들을 노래방에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신곡 서비스만을 강조하는 한국의 노래방에서 정태춘은 그저 1980년대 서정을 노래한 시인으로만 남아 있다. 그, 래, 서, 한달 전 아예 기타를 샀다. 이왕 흉내낼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올여름은 집 옥상에서 기타 연습이나 해야겠다. 난데없는 소음에 시달릴 공덕동 주민들에게 미리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