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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의 작업의 순간] 전망 없는 밤의 독서
이다혜 2009-08-07

<전망 좋은 방>, E. M. 포스터 지음 열린책들 펴냄

E. M. 포스터에 따르면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전망을 잊어버리는 사람들과 작은 방에 있을 때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로. 인간이 집에 돌아온 뒤에 또다시 여행을 떠나거나(그 끝은 컴백홈) 사랑의 실패를 겪고도(사랑의 속성상 모든 성공 또한 실패로 귀결된다) 새로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전망을 잊어버리기 때문일까 작은 방에 있을 때도 그걸 기억하기 때문일까. <전망 좋은 방>은 그런 질문에 대한 우회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답이(라고 생각한)다.

<전망 좋은 방>은 <비포 선라이즈>의 원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여행지는 유럽이고, 계절은 여름이고, 젊은 남녀는 사랑에 빠지고, 만날 기약이 없이 헤어진다. 둘의 차이라면 <비포 선라이즈>의 둘은 사랑이나 섹스라는 것에 대해 <전망 좋은 방>의 루시와 조지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루시와 조지는 <비포 선셋>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것. 내용은 단순하다. 젊고 아름다운 영국 처녀 루시는 깐깐한 친척 샬럿과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다. 피렌체에 도착한 두 사람은 예약한 방이 전망이 좋지 않은 데 실망하는데, 같은 숙소에 묵는 에머슨 부자가 자신들의 전망 좋은 방을 양보하겠다고 나선다. 루시는 아들 에머슨, 그러니까 조지와…(더이상의 부연은 생략한다).

루시는 남자주인공과 사랑에 빠지는 여주인공이지만 또한 그런 자신을 관찰하며 놀라고 즐거워하는 관객이기도 하다. “비브 목사가 옳았다. 루시는 음악 이외의 영역에서는 자기 욕망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비브 목사의 기지도 이해하지 못했고, 캐서린 앨런의 수다에 담긴 암시도 읽지 못했다. 대화는 지루했고, 그녀는 무언가 대단한 것을 원했다. 그리고 바람 부는 전차 난간에 서 있으면 그걸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막연히 ‘무언가 대단한 것’을 원했던 루시는 결국 그에 걸맞은 상황에 빠져든다.

그러더니 소년이 남자로 변해갔다. “무언가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저는 혼란을 물리치고 정직하게 이 일을 바라보아야 해요.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루시가 경계심을 느끼고 멈춰 섰다.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게 무언지 알아내야겠습니다.” (중략) 둘은 이미 펜션 근처에 이르러 있었다. 그녀는 강둑 난간에 두 팔꿈치를 기댔다. 그러자 그도 그렇게 했다. 같은 자세가 된다는 것은 때로 마술 같은 효과를 발휘한다. 그것은 영원한 우정을 암시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다. (중략) -<전망 좋은 방>, E. M. 포스터

어떤 순간도 영원할 수는 없지만 영원을 믿는 순간은 반드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여행에서건 사랑에서건. 전망은 잊어도 그 확신(혹은 거의 종교적인 깨달음)의 순간은 잊을 수 없다. 기억하지만 기억하는 게 아닌 혼돈 속에서 할 수 있는 건, 다시 또다시 몸을 던져보는 것뿐. <전망 좋은 방> 영화를 이미 봤다 해도 막상 책을 읽으면 황당할 정도로 새롭고 재미있다. 한밤중에 바느질하듯 단어마다 더듬으며 읽어도 책장은 오리엔트 특급의 속도로 넘어간다. 그 어떤 즐길 만한 전망도 없는 열대야의 벗으로 삼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