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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읽는 장르소설] 귀신보다 무서운 이야기
이다혜 2009-08-06

<항설백물어>

제게는 두살 터울인 언니가 있었어요. 인물이 고운 언니는 이웃 고을의 큰 부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지요. 언니가 시집을 가 더이상 아가씨가 아니게 될 일을 서운해하던 혼례 전날, 저는 언니에게 찰싹 달라붙어 산으로 꽃구경을 갔답니다. 그런데 언니가 그만, 호랑이처럼 커다란 괭이, 그러니까 산묘와 마주친 거예요. 놀란 언니는 실신했는데 정신이 들고도 어쩐지 멍해보였죠. 그런데 혼례날, 식 중에 언니가 없어진 거예요. 언니는 내게만 말해주었어요.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다고. 결국 혼담은 깨졌는데, 언니의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어요. 언니는 산묘와 눈싸움을 했던 그 장소에서 남자 음색과 여자 음색을 나누어 쓰며 노래를 부르고… 그래요, 실성한 거지요. 결국 언니는 굶어죽었고, 시신 주위에는 산묘의 털이 많이도 떨어져 있었답니다.

<전설의 고향>의 한 장면을 떠올릴 만한 이 이야기는 에도시대 괴담을 모티브로 한 괴담집 <항설백물어>의 첫 번째 이야기다. 제목이 어렵고 낯설게 들릴 수도 있지만 <데카메론>의 무대를 에도시대로 옮긴 뒤, 야하고 풍자적이었던 이야기를 항간에 떠도는 괴이쩍은 이야기로 바꾸면 <항설백물어>가 된다. 거센 비가 내리는 밤, 비를 피해 모인 사람들이 저마다 알고 있는 괴담을 이야기한다.

일본 괴담문화 전문가이자 ‘교고쿠도’ 시리즈 등으로 한국 미스터리 팬들 사이에 잘 알려진 교고쿠 나쓰히코는 에도시대 괴담집 <회본백물어>를 모티브로 <항설백물어> 시리즈를 썼다. 시리즈 세 번째 책인 <후 항설백물어>로는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일종의 에도시대 괴담 중편집이라고 볼 만 하지만 으스스한 분위기만으로 끝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왜 그런 이야기가 떠돌게 되었는가, 그런 이야기 속 인물이나 사연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마지막엔 오싹한 반전을 천둥치듯 때려넣으니 홀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소설 속 등장인물인, 괴담을 탐문하고 수집하는 작가 모모스케는 “괴담이란, 기교만으로는 타인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교고쿠 나쓰히코는 기교 이상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한국의 괴담, 전설도 다시 한번 들여다보고 분석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책을 다 읽고 너무 무서워져서 문단속을 다시 하다가, 비오는 밤에 읽지 않길 천만다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내, 비오는 여름밤에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무서운 이야기에 몸부림치며 더위를 좇는 일, 그야말로 여름의 도락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