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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호러에 대한 불신을 깨주마
김도훈 2009-08-18

광적인 믿음을 공포의 대상으로 삼은 <불신지옥>을 주목해야 하는 까닭

한국은 호러영화의 불신지옥이다. 누구도 한국 호러영화의 퀄리티를 믿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믿음은 매년 여름 배신당했다. <불신지옥>은 다르다. 제대로 만들어진 장르영화다. 성실하고 단단하며, 종종 대담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2009년 한국이라는 지옥에 대한 불신의 리포트다.

2008년 12월 서울. 교회 목사가 신도들과 함께 귀신을 퇴치하는 안수기도를 하다가 자신의 아내를 폭행 살해했다. 이들은 기도를 통해 죽은 목사 부인을 소생시키겠다며 시신을 18일간 방치했다. 신도들은 말했다. 안수기도를 했을 뿐 죽일 의사는 없었다. 2009년 3월 광주. 귀신을 퇴치한다며 고등학생을 살해한 무속인 일당이 4년 만에 검거됐다. 이들은 2005년 전남 담양의 점집에서 부모에게 빙의 치료를 위탁받은 17살 고등학생을 마구 때려 죽인 뒤 시체를 유기했다. 이 기사에서 차이점은 없다. 하나는 기독교, 다른 하나는 무속신앙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양식은 같다. 그들의 믿음도 같다.

영화 <불신지옥>은 광적인 믿음이 빚어낸 비극에 대한 영화다. 대학생 희진(남상미)은 고된 아르바이트를 감내하며 홀로 서울에서 살아간다. 어느 날 밤 그녀는 여동생 소진(심은경)의 전화를 받는다. 그게 꿈이었는지 아니었는지 궁금해하던 희진은 동생이 실종됐다는 엄마(김보연)의 전화를 받고 교외 소도시의 본가로 내려간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광적으로 기독교에 심취한 엄마는 하나님께 기도를 열심히 올리면 소진이 돌아올 거라며 경찰서 대신 교회로 향한다. 희진은 경찰서로 찾아가지만 불치병에 걸린 딸을 가진 형사 태환(류승룡)은 도무지 제대로 수사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경찰에게 소진의 사건은 단순한 가출일 따름이다. 그러던 중 아파트 위층에 사는 정미(오지은)가 희진의 눈앞에서 베란다에 목을 매고 투신자살한다. 그녀의 집에서는 소진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된다. 게다가 아파트 주민인 경자(문희경), 옆집 소설가 수경(장영남), 아파트 경비원 귀갑(이창직)은 소진이 사실 신들린 아이였다는 증언을 내놓기 시작한다.

교회의 성령과 무속의 신들림은 같다?

<불신지옥>에는 두 가지 종교가 등장한다. 기독교와 무속신앙이다. (스포일러라 더이상 자세히 밝힐 순 없다만) 두 종교에 심취한 인간들은 소진이라는 소녀를 둘러싸고 각자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비극을 만들어낸다. 이용주 감독은 두 종교가 한국에서는 결국 기복(祈福)신앙이라는 점에서 일치하는 데가 있다고 말한다. “교회 다니는 분 중에는 성령을 느꼈다는 사람도 있다. 그것 역시 무속에서 말하는 신들림과 비슷한 궤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만약 그걸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면 그냥 그대로 이해를 하면 된다. 그러나 과학적인 증명은 불가능하다. 증명이 안되기 때문에 믿음이라는 게 필요하다. 문제는 그 믿음이 대체 어디를 향하냐는 것이다.”

한국의 믿음은 결국 기복신앙으로 귀결된다. 영화에서 “왜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냐”고 묻는 희진에게 엄마는 말한다. “소진이 낫고 우리 가족 다 잘되게 해달라고. 뭐가 더 필요해?” 이 대사는 <불신지옥>이 표현하는 공포의 대상이 일그러진 기복신앙이라는 것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그런 게 기복의 담론이다. 내가 원하는 것만 이뤄주면 믿음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희진의 엄마는 기복이 좌절되자 더욱 믿음을 강건히 한다. 광신도가 되어버리는 거다. 그럼으로써 믿음 자체가 공포가 된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영화가 다소 센세이셔널한 제목과 명확한 주제에도 주류권 종교에 대한 완전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뜨거운 감자 앞에서 잠시 머뭇거린다고 불평하는 것도 온당하다. 하지만 <불신지옥>이 전달하는 메시지는 충분히 현재적이고 유효하다.

과장된 효과음보다 실제 배경음을 살려

<불신지옥>은 근래 보기 드물게 장르의 법칙을 기술적으로 잘 활용하는 한국 호러영화다. 프로덕션 디자인은 일급이다. <불신지옥>은 연극적인 미술에 의존하던 한국 호러영화의 경향을 과감하게 내버렸다. 박찬욱과 김지운 이후, 한국 호러영화계는 일상성을 무시한 화려한 미술에 의존해왔다. 대부분은 그게 영화의 가장 커다란 단점으로 작용했다(생각해보라. 21세기 한국의 호러영화에 다리오 아르젠토식 인테리어가 어울릴 리 없다). 이용주 감독은 “무조건 현실적으로 가고 싶었다. 형식성을 강조하지 말자는 게 목표였다”고 말한다. <불신지옥>에는 과장된 효과음 역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주인공의 악몽 장면이 등장할 때도 금속성의 기계음 따위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신지옥>의 사운드는 묘하게 관객의 공포를 자극하는 데가 있다. 불확실한 앰비언스(ambiance: 배경음)를 절묘하게 활용한 덕이다.

이용주 감독은 말한다. “음향감독에게도 다른 영화들보다 냉장고 팬 소리 같은 앰비언스를 높여달라고 요청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소리를 섞자고 했다. 앰비언스 자체가 공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들이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벽 너머 옆집에서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듯한 음을 섞음으로써, 이 공간에 단둘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다.” 그간 한국 호러영화들이 과도한 효과음과 센티멘털한 스코어를 남발하며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했던 걸 돌이켜보자면, <불신지옥>의 사운드 사용법은 좋은 기준으로 삼을 만하다.

휴대폰 불빛에만 의지하는 지하실 장면 최고

<불신지옥>은 아쉬운 점 역시 분명한 영화다. 호러 장르의 정형화된 관습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욕심은 충분히 빛을 발한다. 다만 그런 욕심은 양면의 날이 되기도 한다. 시각적인 쇼크 효과에 기대지 않음으로써 얻는 것은 많지만, 그 때문에 장르적 쾌감이 후반부로 가면서 조금씩 옅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신지옥>이 장르를 벗어난 아트하우스용 영화라는 소리는 아니다. 첫 번째 희생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투신자살하는 장면은 (샘 레이미와 웨스 크레이븐의 즐겨 사용하는) ‘연속적인 쇼크 효과’의 리듬이 멋지게 살아 있다. 최근의 <여고괴담> 시리즈를 비롯한 많은 호러영화들은 그저 희생자가 투신자살하는 모습만으로 관객을 놀라게 할 수 있다는 나태한 망상을 지니고 스스로 추락했다. <불신지옥>은 투신장면에 연속적인 리듬을 부여함으로써 근사한 호러 시퀀스를 하나 창조해냈다. 휴대폰 카메라의 불빛에만 의지하는 후반부의 지하실 추적 장면은 <불신지옥>의 심장이다. 이용주 감독과 촬영감독, 조명감독은 어둠을 어둠 그대로 사용하는 대담함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의 공포로 관객의 신경을 틀어쥔다.

한국 호러영화의 오랜 질적 저하는 단련된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가 신인들의 손쉬운 입봉작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다. 호러는 감독의 기본적인 연출력이 완전히 까발려지는 장르다. 게다가 종종 이 장르는 감독의 개인적인 취향을 필수로 요한다. <불신지옥>은 위의 규칙들로부터 비범하게 예외적이다. 이용주 감독은 호러영화광은 아니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불신지옥>은 꼼꼼한 테크니션이 최선을 다해서 만든 좋은 장르영화의 미덕을 지니고 있다. 윤종찬의 <소름>이 그러했듯이, <불신지옥>은 이후 한국 호러영화의 어떤 스탠더드가 될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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