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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휴스] <나홀로 집에>만 기억하면 섭섭하죠

80년대 청춘영화의 아버지, 존 휴스 또는 에드몽 당테스를 기리며

존 휴스의 죽음을 접하고 그의 커리어를 다시 정리하는 과정은 낯설고 혼란스럽다. 그가 겨우 59살밖에 안되었나? 아니, 그가 59살이나 되었는가? 수많은 존 휴스 영화들 중 그가 직접 감독한 영화가 겨우 여덟편밖에 안되나?(<휴가대소동>과 <프리티 인 핑크>가 존 휴스의 감독작이 아니라고?) 언제나 맹렬한 일벌레를 자처했던 그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도대체 어디로 갔던 걸까? 왜 평생 시카고 토종을 자처했던 그가 하필이면 뉴욕에서 죽은 걸까.

이 혼란스러움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휴스를 나이 먹고 경력을 쌓으면서 성장하는 예술가처럼 보지 않는다. 휴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마치 옛 록스타처럼 특정 장르와 시대와 나이에 영원히 갇혀 있는 존재로 본다. 망각은 자연스럽고 죽음은 당혹스러우며 기억되는 이미지는 언제나 젊다.

존 휴스의 영화를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관객에게 존 휴스 영화에는 하나의 분명한 이미지가 있다. <조찬 클럽> <식스틴 캔들스> <페리스의 해방>과 같은 그의 감독작들을 보자. 영화관에서보다는 먼지가 지저분하게 쌓인 VHS테이프로 봐야 오히려 더 어울릴 것 같고 영화보다는 그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몰리 링월드, 매튜 브로데릭, 에밀리오 에스테베스, 알리 시디)의 책받침 사진들이 더 익숙한 이 시카고 배경의 80년대 청소년영화들은 당시 주관객층이었던 미국 청소년들에게 진지한 드라마와 의미있는 삶의 대안과 환상을 한꺼번에 제공했다. 휴스는 마치 막 청소년기에서 벗어난 젊은 교사처럼 그들의 고민을 진지하게 받아주었고 그들이 공감하고 납득할 만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으며 그들의 시대에 맞는 스타들을 제공했다.

80년대를 거쳐 9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직접 감독하기를 멈추었고 대신 제작과 각본에만 열중했다. 그 과정 중 관객층과 주인공의 나이도 어려졌다. 청춘영화들은 자리를 감추었고 대신 <베토벤> <나홀로 집에> <베이비 데이 아웃> <개구쟁이 데니스>와 같은 어린이 중심 가족영화들이 뒤를 이었다. 매컬리 컬킨과 같은 대스타의 발굴과 <나홀로 집에> 시리즈의 상업적인 성공에도 많은 휴스 팬들은 이 시기를 그의 쇠퇴기로 본다. 비교적 가벼운 작품에만 사용되는 필명 에드몽 당테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21세기에 들어와 그는 거의 활동을 멈추었고 줄기차게 나오는 <베토벤>과 <홈 얼론>의 DVD 속편 시리즈를 제외한다면 영화계에선 그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각본가 크레딧에 에드몽 당테스의 이름이 박힌 그의 마지막 영화 <드릴빗 테일러> 역시 그가 오래전에 미완성으로 남겨놓았던 원고를 바탕으로 만든 작품으로 현재진행형의 의미는 없다.

비록 전성기는 짧았고 그 당시 만들어졌던 작품들 역시 고전보다는 한 시대의 유물로 기억되지만 휴스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의 진지한 접근법은 장르 내에서 희귀해졌지만 그가 시작한 청춘영화의 흐름은 21세기의 첫 10년을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지금은 중년에 접어든 30, 40대의 옛 추억으로만 존재한다고 해도 <식스틴 캔들스>나 <조찬 클럽>과 같은 영화들이 제공해주었던 짜릿함은 결코 쉽게 잊혀져서는 안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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