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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액세서리] 모자는 카우보이의 자존심

빔 벤더스와 그의 ‘미국인 친구’ 샘 셰퍼드가 <파리 텍사스> 이후 20년 만에 의기투합해서 만든 영화 <돈 컴 노킹>. 예상했겠지만 ‘길의 왕’ 빔 벤더스답게 화면 안에는 하늘과 구름, 지평선과 텅 빈 도로가 유유히 흘러간다. 미국의 넓은 땅을 관통하는 조용한 풍경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고독하기도 하고 낮에 뜬 달처럼 망연하기도 하다.

첫 장면,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쏜살같이 벌판을 지나간다. 술 달린 스웨이드 재킷과 꽃 자수 셔츠, 박차가 달린 카우보이 부츠 차림이다. 그 시간 영화 <팬텀 오브 웨스트> 촬영장에선 주인공이 사라진 일을 두고 일대 소동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첫 장면의 남자는 이제 막 촬영장에서 탈출을 감행한 ‘웨스턴 액터’ 하워드 스펜서다.

그는 한때 서부영화의 독보적인 존재였으나 이젠 보드카와 코카인, 섹스 스캔들로 얼룩진 과거를 떠안고 사는 늙고 한물간 배우다. 그의 인생을 두 마디로 표현하자면 ‘무책임과 부도덕’이랄까. 트레일러에서 시골 여자들과 한바탕 뒹군 다음날 역시 ‘무책임하게’ 촬영장을 빠져나간 하워드는 길거리에서 만난 노인과 옷을 바꿔 입는 것으로 촬영팀의 추적을 따돌리고자 계획한다.

낡은 체크 셔츠와 패딩 조끼, 랭글러 청바지를 입고 화려한 부츠도 벗어둔 채 양말 바람으로 차를 빌리고 버스도 탄다. 그런데 그토록 눈에 띄는 카우보이 모자는 시종일관 쓰고 있다. 터미널에서 신용카드를 반으로 자르고 휴대폰까지 박살내는 “도시여, 안녕. 과거도 안녕”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그놈의 모자는 벗지 않는다. 드문드문 알아보는 사람들이 싫어서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면 선글라스를 얼른 쓰면서도 그게 여자일 경우엔 모자 챙을 잡고 웨스턴식으로 인사까지 한다.

그러고 보니 하워드와 옷을 바꿔 입은 노인도 “모자는 못 줘. 30년을 쓴 거니까”라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경찰이나 선장처럼 모자는 과연 카우보이의 자존심이다. 하워드 역시 한평생을 카우보이로 살았다. 이제는 모든 게 지겨워져서 그만 떠나고 싶을 때마저도 카우보이 모자는 그에게 레종 데르트(존재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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