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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죽을 때에야 얻어지는 행복의 역설

<애자>, 눈물을 요구하는 그 통속성에 대하여

“너랑 다시는 영화 안 봐 , ㅆㅆ(욕). 울고 싶지 않았는데 울었잖아. ㅆㅆ(역시 욕).” <애자>를 보고 사람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대낮, 극장에 올 수 있었던 하릴없어 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젊은 남자들 세명이 나누는 말이다. 속절없이 눈물을 흘리게 하는 영화를 두고 최루물이라고 한다. <애자>가 그렇다. 험담이 아니다. 관객의 신체적 특정 반응을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극장 안은 이미 눈물바다였다.

최영희(김영애)와 박애자(최강희)는 모녀다. 부산내기들이다. 부산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투리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감정이 오가는 방식 때문이다. <친구> 이후 <애자>라고나 할까?

생기있는 악다구니가 최고의 장점

최루물이라고 하나 이 영화의 장점은 생기있는 악다구니다. 영희는 동물병원 수의사이고 애자는 하늘이 내린 문장력의 소유자다. 시장통의 아줌마도 아닌 여자들의 입담이 대단하다. 영화는 살짝 현실적이기도 하고 과장도 섞인 잡종, 하이브리드 최루다. 주인공 영희와 애자로 가기 전에 이 영화를 기존의 신파와 차이나게 만든 바로 이 하이브리드에 대해 잠깐 소묘해보려 한다. 사실 영화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들이 밀집해 있다가 편집에 의해 밀려나간 모습을 하고 있다. 밀려난 것이기도 하고 괄호쳐진 것이기도 할 텐데 4년 동안 시나리오를 준비한 덕분일 것이다. 난 이 괄호쳐진 것들이 재미있다.

모종의 출판 대박을 기획하는 신문사 여부장(장영남)은 애자의 미래를 담보하고 있다. 이 사회 선배 여자와 애자의 관계는 영화의 가장 불투명한 부분 중 하나다. 더불어 지적하자면 애자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기는 배신을 당한다. 영화에서 엄마와 딸은 애정을 극적으로 회복하는 반면 애자와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다. 뭐, 여자들간의 관계를 유토피아적으로 그리라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가 들어맞지 않는 부분에 대한 생각이다. 예컨대 모녀관계의 굴곡에 이렇게 정성을 들인 영화라면, 여자들의 다른 관계도 좀 유별하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 하나 통상적으로 평이하게 그린다는 점이다.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직업이 독특하고 제각각이다. 최영희가 수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 애자가 선을 보는 남자(김C)도 수의사인데 둘이 주고받는 구지가가 엉뚱하다. 반면 애자의 남자친구는 홈쇼핑 PD인데 성격을 종잡을 수 없다. 애자의 남자친구로서 마음을 끓이는 듯하다가, 곧 다른 여자들과 잘도 사귀고 홈쇼핑 촬영장 스탭들에게 함부로 군다. 엄마 영희는 그 장면을 몰래 지켜보고 이 남자친구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영화의 상영시간 110분에 담을 수는 없었으나 영화의 스토리텔링 밖에서 바글거리는 이 인물들은 <애자>의 형식을 영화보다는 TV시리즈물적 에피소드로 생각하게 한다. 집중과 분산이 뒤섞여 있는 시추에이션. 위의 하이브리드는 TV적인 것이었다.

<해운대>의 1천만 관객을 지나 이제 박스오피스를 파고든 <애자>는 일찌감치 치명적 병을 엄마 영희에게 주입해 눈물을 준비한다. 엄마 영희는 예사롭기도 하고 예사롭지 않기도 하다. 김치를 담가 자식에게 보내고, 땅을 팔아 아들의 사업 밑천을 대고 하는 점은 평범 엄마에 속한다. 반면 애자를 다루는 방식은 특이하다. 물론 애자도 평범하진 않다. 엄마는 딸의 뒷덜미를 예사로 잡고 때린다. 애자는 소설 습작을 하는 문학 소녀인데 같은 소설가 지망생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노는 아이들과 어울려 담배 피우고 싸움하면서 지낸다. 쌈질이 나서 경찰서에서 합의를 보게 되자 엄마는 딸의 어금니를 빼게 해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점한다. 엄마의 이러한 독한 특성은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면 사라지지만, 애자의 좌충우돌은 지속된다.

처음부터 엄마에 대한 애자의 불만은 오빠와 자신에 대한 남녀자식 차별이다. 오빠만 외국에 보내준 것에 대한 불평이 크다. 이후에도 엄마는 아들에게만 경제적 지원을 한다.

괴짜 모녀의 서로에 대한 독설은 물론 이 영화의 핵을 이루지만, 그 독설의 핵심은 분명치 않다. 수의사와 같은 현실적 직업을 가진 엄마가 소설 습작을 하는 딸이 글쓰기로 빤스 한장 못 사입는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는 것은 상식이지 뼈아픈 독의 근원은 아니다. 예의 하이브리드적 산만함과 집중력을 들쭉날쭉 플롯과 인물에 배열하는 영화는 둘 관계의 외상의 근원을 엄마의 질병과 갑자기 겹쳐놓는데 그것은 아버지의 죽음, 교통사고와 관계있다. 엄마는 은연중 딸이 그 사고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부분은 엄마의 시각으로만 재연된다는 것이다. 딸 애자가 이것을 의식하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러한 무의식적 원망이 배경에 작용하지만 영화는 애써 그것을 모른 채 슬쩍 언급만 하고 지나친다.

위의 하이브리드한 것에 이어, 외상을 영화 내에 장치하고 인지하긴 하지만 깊이 파고들진 않는 것이 대중영화로서 <애자>의 안전장치인 것 같다. 남편의 죽음 이후 엄마 영희는 동물병원을 하면서 자식들과 자신을 부양하는데, 많은 유기견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수의사의 사회적 역할 부분에 따른 문제도 영화는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늙고 병든 유기견과 최영희를 엇비슷하게 겹쳐놓고, 최영희의 온정을 그리는 정도에서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가 엄마와 딸의 관계를 통해 잘 그려내는 사회적 무의식은 새롭게 변한 모녀관계도 모녀관계지만 돌봄 노동에 대한 탐구다. 엄마가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아들은 공장 일이 바쁘다며 병구완을 애자에게 부탁한다. 며느리는 임신 중이다. 엄마가 아프기 전 애자라는 인물이 그려진 방식은 이런 돌봄 노동의 적임자와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늘 노트북을 붙잡고 있는 예비 작가이고 왈패다. 무엇보다 부산의 엄마와 떨어져 서울에 산다. 독립적이다.

영화는 필사적으로 이러한 애자에게 엄마를 돌보게 만든다. 위의 특성으로 보아서 돌봄 노동에 적합한 애자의 장기는 전무하나, 친자 중에서도 딸이라는 점이 이러한 돌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래서 처음부터 애자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 요란스럽게 설정되어 있음에도 관객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도 엄마의 시한부, 극적 삶이 애자의 소설의 깊이나 너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음을 알지 못한다. 반면 엄마는 애자에게 노트북을 활용해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그래서 엄마의 마지막 유언은 애자가 타자 연습으로 가르쳐준 문장이며, 영화의 마지막 애자의 소설 제목이 바로 이 문장이 된다.

이상한 방식으로 영화는 <효녀 심청>의 현대판 돌봄의 이야기가 되는데 여기서 딸은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를 돌보아야 하고 은연중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죽게 한 미필적 고의가 의심되는 설정이다. 즉 영화는 필사적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같은 플롯을 통해 딸에게 엄마를 보살피게 한다.

비극이 아니라 성장, 혹은 성취

이 영화가 사회에 돌려주는 위로와 눈물은 그래서 <미워도 다시 한번>류의 미혼모의 애절한 모성이거나 최근 <마더>와 같은 사회적 적응력이 떨어지는 아들에 대한 원초적 모성과 같은 것이 아니라 별난 딸이라도 엄마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돌보게 될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것이다. 이 영화의 관객을 조사해본 것은 아니나 난 이 영화가 주로 말 거는 대상이 그래서 두 세대에 걸친 모녀라기보다는 아줌마들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즘 50대 여성의 세 가지 행복의 조건이 ‘딸, 돈 그리고 친구’라고 하는데 영화 <애자>는 그런 면에서 보자면 영희의 행복의 조건으로 애자가 등록되는 이야기다. 그래서 괄호쳐진 제목은 <영희>다. 여기서의 역설은 행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죽을 때라는 것인데, 영화로만 두고 보자면 50대 여성의 행복의 세 가지 조건이 다 갖추어지는 순간의 불가능함 같은 것이다.

살아 있을 때 가능하지 않은 일이 죽음을 두고 가능해지는 이야기는 근본적으로 비극적이나, 영화는 그것을 비극이라기보다는 성장이나 성취의 이야기로 구성한다. 불가능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내나 그 불가능성과 가능성은 긴장의 역학을 갖는 대신 통속적으로 봉합된다. 그래서 이런 통속성은 눈물밖에는 요구할 것이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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