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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여기,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다

<인디펜던시아> 연출한 필리핀의 신성 라야 마틴을 주목하라

<인디펜던시아>

부산에서 몇편의 영화를 보았고 그중에서, 한국에서는 결코 개봉되지 않을, 그러나 잊을 수 없는 영화 한편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 영화는 필리핀의 신성 라야 마틴의 <인디펜던시아>이다(이 감독을 주목하라고 일러준 사람은 감독으로 부산을 찾은 정성일 선배다. 그의 변치 않는 감식안은 언제나 귀한 선물이다. 맡은 일 때문에 봐야 했던 뉴커런츠 부문의 영화들 중에선 지난해의 <날고 싶은 눈먼 돼지>나 <잘라이누르>에 버금가는 작품을 만나지 못했다).

<인디펜던시아>를 올해의 수작 중 한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전적으로 독창적인 재능의 산물이다. 빛과 소리와 움직임을 지휘하고, 침묵과 잔상을 교직하는 능력, 역사적 상상력과 시적 수사학의 황홀한 조우, 시네마틱한 순간을 향한 순결한 추구까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디펜던시아>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이래 아시아영화의 가장 뛰어난 재능의 탄생을 알리는 선언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이 25살 청년 감독의 다른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인디펜던시아>만으로도 이 확신을 주저하게 되지 않는다.

유령의 영화, 유령인 영화

이 영화 대신 같은 필리핀영화인 브리얀테 멘도사의 <도살>을 경쟁부문에 올리고 감독상까지 선사한 것은 올해 칸영화제의 중대한 실수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끔찍한 생활상이 담긴 지역(대개 비서구) 민속지를 안토니오니식의 세련된 모더니즘 서사로 다시 쓰는 방식은 서구 영화제가 여전히 애호하는 스타일이며 <도살>은 2년 전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 그랬듯 그것에 영리하게 영합하고 있을 뿐이다. 1세계 지식인들은 안락의자 휴머니즘에 호소하는 비서구 지역의 충격적 정보를 제공받으면서 은폐된 쾌락과 문화적 허영심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이다.

라야 마틴은 그 반대편에서 시작한다. 그는 어떤 정보와 지식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대상을 택한다. <인디펜던시아>의 인물들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숲속에 은둔한 이래 세계와 더이상 접촉하지 않고 죽어버린, 증언될 수도 기록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게다가 라야 마틴은 무성영화 그리고 영화사 초기의 뉴스릴의 질감과 움직임을, 심지어 야외장면을 스튜디오에서 찍는 방식까지 자의식적으로 전용한다. 그를 통해 <인디펜던시아>는 자신을 손상된 낡은 필름으로 가장한다. 그 시대 필리핀의 무성영화는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니 <인디펜던시아>는 피사체도 필름도 모두 헛것이다. 이것은 어떤 유형화와 지도 그리기에도 편입되기를 필사적으로 거부하는 유령의 영화, 그 스스로 유령인 영화다.

부재, 헛것, 유령, 죽음이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는가. 라야 마틴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영화라고 믿는 것 같다. 영화야말로 소멸된 주체, 사라진 독립의 이상을 드러내는 방법이라고 믿는 것 같다. 라야 마틴은 올해 칸영화제(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이 영화가 처음 선보였을 때, 상영 전 무대인사에서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그리고 영화를 위해 죽을 수 있기를 원했다”라고 말해 관객을 당황케 했다고 한다. 너무 뜨거운 말, 너무 순결한 말은 늘 수상쩍다. 게다가 ‘조국’과 ‘영화’가 너무 가까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인디펜던시아>를 보고 나면 그의 말이 주문처럼 머리를 맴돈다. 이 영화는 순결한 순교의 영화다. 여기엔 순교의 설득이나 순교의 선동이 없다. 오직 순교의 과정만 있을 뿐이다.

무엇을 위한 순교인가. 조국? <인디펜던시아>라는 제목과 함께 우리는 그렇게 이 영화 보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크린이 밝아오면 마을 공터에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춤을 추고 있다. 말과 수레와 사람들이 부드럽게 교차하고 평화로운 민속음악이 울려나오는 이 첫 장면은 드레이어 후기작들의 실내장면이 떠오를 만큼 우아한 기품으로 가득하다. 갑자기 멀리 포성이 울리고 음악이 중단되며 사람들은 얼어붙듯 동작을 멈춘다. 촌장처럼 보이는 노인이 어두운 얼굴로 말한다. “그들이 오고 있어.” 곧이어 다시 말한다. “아직 몇번의 춤은 더 출 수 있어.”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3세기 동안 지속된 스페인의 식민지 지배, 향후 40여년을 지배할 새로운 점령군인 미국의 도착, 그 교체기에 허용된 짧지만 눈물겹게 흥겨운 시간 그리고 그것의 소진, 임박한 죽음의 예감.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지지하고 싶은 이 눈부신 첫 시퀀스는 아찔하게 아름답고 간결한 운율로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담는다. 그리고 한 모자가 숲으로 향한다. 이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모자는 숲속에 버려진 스페인 점령시기에 지어진 낡은 움막을 개조해 살아간다. 미군에게 강간당하고 버려진 여인이 새 식구가 되자 어머니는 곧 죽고 여인은 아들을 낳는다. 그들도 곧 죽는다. 이야기는 극히 단순하지만 <인디펜던시아>의 세부는 거의 해독 불능의 비의로 가득하다. 지역사와 가족사의 기억, 신화와 환상이 가족의 일상 위로 계통없이 교차된다.

그 세부들을 놓친다 해도 영화의 거의 전부에 해당되는 숲속 장면들은 반복적인 흑백화면임에도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답다. 정숙한 카메라, 바람과 풀잎과 벌레와 산새들이 만나 무언가 끝없이 속삭이는 풍경들, 우아하게 움직이는 순박한 인물들 그러나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들, 불길하거나 우울한 현의 울림, 때로 천상에서 들려오는 듯한 청아한 노랫소리, 무엇보다 빛과 그림자의 숨막히는 몽타주.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동시에 잔혹하고 두렵고 무서운 아름다움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릴 때 처음엔 미물의 평화롭고 수동적인 몸짓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그 반복되는 흔들림은 숲의 무심하고도 완강한 현존, 그것의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점점 더 무서운 초월적인 힘으로 변해간다. 결국 부부의 삶을 앗아가는, 5분이 넘는 대단원의 폭풍우 시퀀스는 빛과 어둠의 교차 그리고 천둥소리만으로도 전율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대목이다.

무르나우의 자연도 압도적이고 무서웠지만 그것은 종종 <선라이즈>에서처럼 마법과도 같이 인물들을 축복한다. <인디펜던시아>의 가련한 가족들은 불행하게도 그런 행운을 얻지 못한다. 점령군을 피해 은둔한 이 가족은 이제 잔혹하고 예측 불가능한 숲의 자연성을 버텨내야 한다. 이들은 점령군에 대해서도 그랬듯 자연과도 싸울 의지가 없다. 무르나우의 인물들처럼 이들은 한번 선택하고 충실히 믿으며, 세계를 극복하려 들지 않는다. 이것이 필리핀 사람들의 기질인지는 모르겠다. 숲속 가족에게 중요한 건 의지가 아니라 믿음이었다. 약속, 신화, 전설에 대한 믿음.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씩 부서진다.

죽음에의 집착이 불길하다 해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나와 함께 있을 것, 그리고 나를 믿을 것”을 맹세하게 하지만 강간당한 여인이 등장하면서 그 맹세는 깨지고(은밀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어머니는 곧바로 병들어 죽는다. 할아버지에게 거대한 뱀과 싸워 이길 힘을 주었고 아버지에게 물려졌으나 아버지의 나쁜 행동(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으로 숲이 거둬간 수호석(守護石)은 끝내 아들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아들은 언젠가 숲의 끝에 있는 바다로 가겠노라고 말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죽는다. 아이가 보았으며 그 아버지가 사악한 군대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한 ‘빛으로 빚은 옷을 입은 거대한 숲속의 정령’은 여인의 눈에 잠시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어머니는 강간의 기억을, 여인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받은 핍박의 기억을, 아들은 전쟁의 기억 혹은 공포를 악몽으로 떠올리며 그 소규모의 가족조차 조화의 순간에 이르지 못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숲으로 진입한 미군들로부터 도망가던 아이는 절벽 앞에 이른다. 처음으로 아이의 헐거운 옷이 붉은색으로 변하고 아이는 잠시 망설인 뒤 뛰어내린다. 후경의 그림에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다. 찬탄하며 이 영화를 보았다 해도 이 대목에선 그저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는 왜 자살을 택한 걸까. 그 자살의 몸짓은 왜 저토록 소름끼칠 만큼 아름답게 그려진 걸까. 나는 아직 적절한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다만 아이의 투신은 이 가족의 최종적 부재를 완결짓는 마침표이다. 그것은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영화적 선택이다. 역사로부터 완전히 단절됨으로써 완성된 부재, 실패와 부재와 죽음으로서만 자신을 드러내는 <인디펜던시아>의 영화적 순간이 그렇게 도래한다.

라야 마틴은 <인디펜던시아>를 향한 순교만큼 영화에의 순교를 다짐하고 있다. 그 죽음에의 집착이 불길하다 해도, 이것은 일찍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제3세계 영화의 신경지다. 20세기 네오리얼리즘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 무성영화의 기억을 경유해 영화의 초월적 힘을 복원하려는, 그것을 통해 부재한 인디펜던시아의 이상을 꿈꾸는 이곳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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