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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조롱하거나 혹은 탐닉하거나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백야>와 <얼굴>이 제시하는 예술영화의 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기억할 만한 순간들이 꽤 있었다. 그중에서 대조적인 두편의 영화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하나는 고바야시 마사히로 감독의 일본영화 <백야>이고 다른 하나는 유명한 차이밍량의 <얼굴>이다. <백야>는 자주독립영화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영화이고 그만큼 저예산영화의 가난한 몰골이 확연히 드러나지만 뼈만 앙상한 상태인데도 막판에 확 올라오는 창작의 기개가 있었다. <얼굴>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지원받은 기획이라고 하는데 과연 고급스럽고 황홀한 이미지의 향연이었다. 아트하우스에서도 상영될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이 아방가르드한 영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영구 보존된다고 한다.

먼저 <백야>부터 언급해보자면, 스토리는 간단하다. 프랑스 리옹의 붉은 다리에 찾아온 한 일본 여자가 추운 겨울 날씨를 참으면서 누군가를 기다린다. 지나가던 웬 싱거운 일본 남자가 그 여자에게 같은 일본 사람이라는 구실로 수작을 거는데 여자는 눈길 한번 제대로 주지 않는다. 추근대던 남자가 사라진 뒤에도 여자는 계속 누군가를 기다린다. 아까 추근대던 일본 남자가 다시 나타나 몸이 얼 것 같은 날씨에도 계속 버티는 여자의 가련한 처지를 동정하지만 여자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다. 나중에 밝혀지는 여자의 사연은 일본에서 방금 리옹으로 날아왔으며 이곳 해외 지사에 근무하는 유부남 애인이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갔다 오늘 돌아올 예정이며 여자는 자기가 이 다리에서 기다리겠노라는 전갈을 그의 회사 동료 직원에게 전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중이다. 여자는 일본에서 가족을 비롯한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가진 돈을 전부 털어 홀로 일본으로 왔다. 그녀는 애인을 만나 담판을 짓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다.

<백야>는 30여분이 넘도록 리옹의 붉은 다리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남녀 주인공이 다리 위에서 줄곧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 이러다가 끝까지 다리 위에서 모든 상황이 종결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극단적인 예상을 할 무렵에야 배경이 바뀌는데 그래 봤자 남녀 주인공이 근처 카페에 가서 몸을 녹이며 역시 하나 마나 한 농담과 비아냥과 동정을 나누는 게 전부다. 남자는 내일이면 일본으로 돌아갈 상황인데 여자의 처지가 안됐는지 여자 애인의 회사에 대신 찾아가 여자가 기다리는 남자가 밤늦게야 출장에서 돌아온다는 걸 알아내고 여자에게 그 시간 동안 리옹 시내 관광을 제안한다. 여자는 호텔에 돌아가 근사한 정장으로 갈아입고 나오고 두 사람은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한다.

<백야>, 사랑타령에 대한 느긋한 야유

대충 이런 이야기다. 별다를 것 없는 이야기지만 관객과의 대화에 낮술이 깨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난 고바야시 마사히로의 입담은 대단했다. 자신의 필생의 프로젝트였던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레오스 카락스가 <퐁네프의 연인들>을 만들 때 훔쳐간 것이 아니었을까, 의심된다는 둥의 허풍과 농담을 섞는 식이었다. 자기가 만드는 영화는 말이 많은 영화와 말이 거의 없는 영화로 나뉘며 그걸 절충하지 못해 늘 흥행에 실패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그는 주류영화에 태연하게 대적하는 독립영화감독의 기개를 뿜어냈다. 클로드 를르슈의 <남과 여> 같은 영화와 비슷한 반열에 놓이기를 희망하는 듯한 그의 말이 실은 장난기가 발동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 <백야>는 그런 감상적인 주류영화가 유포하는 사랑의 관념에 대한 과격한 조롱이다.

나이를 먹은 주인공이 파업이 한창인 리옹에 와 붉은 다리 위에 서서 추억에 잠기는 것으로 시작하는 <백야>는 전후 센티멘털리즘의 대표작인 <애수>의 분위기를 슬쩍 끌어온 다음 미사여구 화면으로 감정을 수식하는 <남과 여>의 노선을 따르는 영화인 척한다. 가시돋친 말들이 남녀 주인공 사이에 오가기도 하지만 이들은 여행자이고 외롭고 사랑을 갈구한다. 그들은 하룻밤 동안 급속히 친해지며 급기야 밤늦게 북구에 함께 가서 백야를 보자고 의기투합한다. 좀 어색하지만 낭만적인 미친 사랑의 연대기로 가쁘게 달려가는 척하는 이 영화에서 화면은 가끔 흑백으로 바뀐다. 괜히 예술영화인 척하는 듯이 보이는 이 수사는, 감독의 말에 따르면, 로맨틱한 몽상을 꾸는 남녀 주인공의 마음 한구석에 현실적인 이성이 고개를 들고 나올 때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여자는 거의 미친 것이나 다름없다. 저녁때까지 오지 않을 애인을 기다리는 동안에 그날 처음 본 남자가 시내 관광이나 하자고 하자 마지못한 척 수락하면서 여자는 호텔로 돌아가 화려한 정장차림을 한다. 이국에서 근사한 사랑의 여주인공이 된 기분을 내려는 것이다. 대책없는 여자다. 남자는 그런 여자에게 충동적으로 끌려 일본에 돌아가 새 생활을 시작하려는 결심을 접고 무작정 여자와 북구로 낭만적인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역시 대책없는 남자다. 그들의 낭만적인 몽상을 지지하는 척하는 듯한 영화는 끝내 정체를 드러낸다. 심야에 열차를 타려던 남녀 주인공의 계획은 틀어지고 여자는 여전히 혼자 다리 위에서 남자를 기다린다. 그녀가 애인을 기다리는 것인지, 새로 만난 남자를 기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자는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윽고 누가 온 것인지, 여자가 기쁜 얼굴로 ‘왔다’라고 외치며 카메라 앞으로 다가오자 화면 색깔은 갑자기 푸른 광기의 빛으로 바뀐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게 이 영화를 낭만적인 사랑의 연대기로 오해하고 본 나 같은 관객에게 먹이는 감독의 강력한 원투 펀치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저기서 사랑타령하는 것에 대한 감독의 느긋한 야유, 대중문화가 부추기는 사랑의 감상에 대한 공격의 구조가 이 영화의 형식적 개념이었던 것이다.

이미지의 신비에 도전하는 <얼굴>

그에 비하면 차이밍량의 <얼굴>은 지극히 자기 탐닉적으로 영화라는 매체가 도달할 수 있는, 그렇지만 과거에 비해 점점 멀어지는 이미지의 신비에 도전하는 영화였다. 대만의 감독이 프랑스에 가서 신화적인 내용을 소재로 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개략적인 시놉시스인 듯한데, 영화만 봐서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다. 프랑스 누벨바그가 끊임없는 참조틀로 언급되며, 그중에서도 특히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 나왔던 장 피에르 레오와 파니 아르당과 잔 모로와 나탈리 베이 등이 나와 유령처럼 떠돈다. 제작자와 주연배우 역으로 나오는 장 피에르 레오와 파니 아르당은 동시대의 이미지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절망의 표상을 떠맡는 듯이 보이고 귀신들처럼 잠깐 나오는 잔 모로와 나탈리 베이는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누벨바그를 추억하는 듯이 보인다.

그 와중에 매혹적인 요정 같은 주연 여배우 라티시에 마송은 틈만 나면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검은 테이프로 칭칭 감고 있으며 대만 감독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외상에 괴로워한다. 아무것도 재현할 수 없는 주변 상황이 암시되는데 그런 영화 속 상황과는 별개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판타지 장면이 나오며 제목 그대로 인물들의 얼굴이 신비롭게 재현된다. <백야>가 절망을 텅 빈 내용으로 지탱한다면, <얼굴>은 절망의 탄식을 감추지 않음에도 이미지의 전능을 믿는 영화다. 서로 다른 갈래의 선택을 보여준 이 두편의 영화는 예술영화의 두 가지 길처럼 보였다. 어느 쪽으로나 몇몇 기억에 남는 이미지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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