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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소녀의 성적 욕망과 강박증

낯설고도 신비로운 그리고 위태롭고 얼마간 무서운 <파주>의 무표정을 숙고함

<파주>는 보고 나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게 만들고 타인의 견해를 궁금하게 만든다. 이 영화가 문제적이라는 뜻이며, 누가 뭐래도 그건 박찬옥의 성취다. <파주>는 헐겁고 모호하다. 그 자체로는 장점도 단점도 아닌 그 빈틈과 불투명함이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사후적으로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 점에 대해선 지난호(728호)에 실린 <파주>에 관한 여러 평 중에서 정한석의 비판론에 대체로 동의한다. 좋은 영화는 결국 좋은 질문이다. 우리가 어떤 영화의 모호함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 영화가 어떤 근본적 질문을 남기기 때문일 것이다. <파주>는 대답이 아니라 질문을 모호하게 만든다. 질문이 물러선 자리에 감상적 숙명론 혹은 모종의 우울증이 들어선다. 정한석이 그 과정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한 분석을 하고 있으므로, 나는 여기서 한 가지 견해만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그 모호함이 권유한 대로 이 영화를 약간 다른 각도로 보는 것이며, 그랬을 때 이 영화의 결함으로 보였던 점 가운데 일부는 수긍할 만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는 하나의 제안이다.

<파주>를 보고 나서 영화를 다시 떠올리려 했을 때 이상한 일은 은모(서우)의 얼굴이 오직 하나의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얼마간 소름 돋는 일이다. 은모는 반항하고 웃고 슬퍼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사랑하고 방황했지만, 내 뇌리에 남은 건 그의 결코 움직이지 않을 듯 무거운 입술과 멍한 응시의 텅 빈 표정이다. 이것은 차라리 무표정이다. 부모의 부재, 상실 위기에 놓인 집, 하나뿐인 혈육인 언니와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의 결혼, 언니의 죽음 그리고 형부의 살해를 의심하는 무시무시한 상상의 연쇄 속에서도 그는 모든 감정을 기어이 감추려는 듯 완강한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달리 말하면 다른 모든 기술적(記述的) 표정을 그 무표정이 삼켜버린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기억에 남은 인상이다. 실제로 서우라는 배우는 영화에서 여러 가지 표정을 짓거나 지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두 번째 봤을 때도 그 인상은 바뀌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 강해졌다. 이상하게도 그녀가 다른 표정을 지을 때는 오히려 어색하며, 무표정이 <웃는 남자>(The Man Who Laughs, 1928)의 그 불행한 사내의 얼굴에 강제로 새겨진 웃음처럼 그녀에 얼굴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인상이 중요한 것은 그녀의 표정이 바로 이 영화의 표정이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연기의 면에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파주>라는 영화의 사건과 공간 안에서 낯설고도 신비로운 그리고 위태롭고 얼마간 무서운 그 얼굴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중식은 주체인가 관찰 대상인가

<파주>는 <밀양> <마더> 등 최근의 문제작과 마찬가지로, 서사 전개의 한 기능으로 축소되거나 하나의 오브제로 전락한 얼굴의 표현 영역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의 신비로운 무표정은 사건에 반응하거나 그것을 예고하지 않고 안개와도 같이 사건을 감싸면서 영화의 층위를 두텁게 만든다. 그런데 <파주>의 얼굴은 무엇을 환기시키는가. 개별적 사건이 아니라면 은모의 얼굴은 어디에 속해 있는가. 특정한 캐릭터의 표현이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혹은 감추는가. 서둘러 말하자면 나는 그의 무표정이 무언가를 환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몇몇 장면을 되새기며 그 근거를 말할 필요가 있겠다.

<파주>는 은모가 택시를 타고 파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시작하고,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다음 떠나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두 장면에서 모두 은모는 예의 무표정으로 앉아 있고, 길에는 안개가 피어 오른다. 안개가 파주라는 지역에 현실 세계와 절연된 상상적이며 관념적 공간의 느낌을 불러온다는 사실은 정한석이 지적한 대로다. 오프닝 시퀀스 이후에 곧바로 중식(이선균)의 8년 전 시점의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그는 도피 중인(아마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운동권이며 구속된 선배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 상상적 무드의 첫 시퀀스와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이 이어붙어 있는 것이다(이후 두 계열은 한 시퀀스 안에 뒤섞인다). 두 계열의 이접이 빚어내는 착시효과에 대한 정한석의 비판적 지적은 예리하다.

하지만 다르게 읽는 방법도 있다. 그중 하나는 이 영화를 주로 관념적 공간(안개 낀 파주)에 거주하는 여자와 주로 현실 세계(저항운동의 장)에 관여해온 남자의 이야기가 병행하는 게 아니라, 전체를 어린 여인의 불안정한 욕망과 성적 강박증이 교차하는 장으로 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영화 전체가 동시대와 긴장하는 사건성이 없는, 은모라는 젊은 여인의 주관적이고 감상적인 회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곳은 사실적 색조 위에서도 실제 사건과 왜상(歪像)과 환상이 안개 속의 불빛처럼 분기하고 교차하고 명멸하는 곳이다. 그런 판단은 다시 말하겠지만 종잡기 힘든 시대 배경, 안개의 물질성, 회상장면의 비대칭성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다면 첫 회상장면은 중식의 회상이나 비인칭 플래시백이 아니라, 은모의 회상 즉 은모에게 기억된 중식의 과거, 아마도 일정하게 윤색되거나 변형된 기억일 것이다.

먼저 회상장면의 리얼리티의 결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파주>의 연대는 모호하다. 영화 속 현재가 오늘일까? 첫 회상으로 불려나온 중식의 8년 전 장면은 확실히 이상하다. 수배당한 운동권 학생이 시대적 초상의 하나였던 시절은 넉넉하게 잡아도 1990년대 중반까지다. 이후에 그런 인물이 없지 않았다 해도 구속자의 면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상황을 2001년의 것으로 체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영화 속 현재는 대략 10년 전쯤으로 보인다. 이 경우에는 구속 중인 운동권 선배의 집(경찰의 감시에 둘러싸여 있을)에 수배자가 은신하고 있다는 설정이 매우 이상해진다. 물론 3년 전 회상장면에 나오는 휴대전화의 등장도 맞지 않는다. 이후 은모가 등장하지 않는 중식의 플래시백과 현재장면도 중식의 고뇌의 궤적을 따라가지 않으며,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는 데 그친다. 이것은 은모가 등장하는 장면의 섬세하고 다채로운 묘사 방식과 상반된다. 전 장면을 통해서 중식은 주체라기보다 관찰 대상에 가깝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은모의 등장으로 막을 열고 그녀의 퇴장으로 막을 내린다.

금지는 은모의 사랑의 조건

지금 파주로 돌아오는 은모는 그러니까 현실의 공간뿐만 아니라 현실의 시간에서도 은밀하게 비껴나고 있다. 그녀가 다시 찾아온 장소와 인물과 사건은 사실적이지 않은 대신, 어린 여인의 성적 환상과 교신하는 기호로 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그중에서 한 가지 대상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은모가 끝내 지키려 하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집’. 놀랍게도 그 ‘집’은 한번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사적으로도 보충되지 않고, 카메라가 그것의 물상적 아우라를 포착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저 주문처럼 두세 차례 되뇌어질 뿐이다. 은모가 ‘집’을 지키려 할 때 무엇을 지키려는지 알기 힘들다. <파주>와 종종 비교되는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의 부재를 증언하는 것이 버드나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초록물고기>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사라진 사람, 사라진 유대, 사라진 공동체를 그 흔적인 버드나무 앞에서 애도하는 의식.

<파주>의 집은 무엇의 흔적인가. 나는 그 집을 기억이 보존된 장소가 아니라 은모의 욕망이 투사된 기호라고 본다. 그 집은 아버지의 집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드러나지 않으므로 우리는 은모가 지키려는 것을 우회적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 집을 둘러싸고 두 남자가 등장한다. 하나는 중식, 다른 하나는 나이트클럽 사장. 전자는 집을 지키려 하고, 후자는 집을 빼앗으려 한다. 공통점은 모두 은모를 욕망한다는 사실이다. 중식은 나중에 말로 고백할 뿐이지만, 사장의 욕망은 그의 시선에 은밀히 담겨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앞좌석에 은모를, 뒷좌석에 사장을 태운 택시기사는 느닷없이 음란한 농담을 한다. 은모와 사장은 처음부터 성적 긴장 관계에 놓인다. 나중에 은모는 철거예정지를 둘러보러온 사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은모는 중식을 욕망하지만 사장의 성적 뉘앙스가 담긴 호의를 받아들여 집을 지킨다. 집-중식-사장의 계열은 은모의 욕망의 대상을 형성한다. 그 꼭대기에 집의 원주인인 아버지가 있다. 집은 그 물질적 대상이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기보다 아버지의 형상 혹은 그 지위의 환유다. 은모가 집을 지키려 하는 것은 아버지를 욕망하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은모는 지금 어떤 기억도 남지 않은 죽은 친부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형상을 욕망하고 있다. 여성 정신분석학자 레나타 살레클은 <시라노 드 벨주락>을 분석하면서 “여자는 연인의 꼭대기에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가?”라고 물은 뒤 이렇게 자답한다. “여자는 사랑의 불안감을 다루면서 그 결과 더 많은 남자를 보유하는 것, 특히 사진 속의 어떤 아버지의 형상을 갖게 된다.”

물론 은모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의 자리에 시간적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중식이다. 그는 첫 회상장면에서 드러나는 바 시대의 어둠과 내면의 어둠을 모두 짊어진 우울한 방랑자, 동시에 지성과 도덕의 아버지였다. 문제는 은모에게 중식은 처음부터 금지된 욕망의 대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선생님이었고, 형부였고, 언니가 죽은 뒤에도 또 다른 여인과 친교하는 남자였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금지가 사랑을 중단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비등시킨다. 정확히 말하면 금지가 은모의 사랑의 조건이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다. 그것은 격리다. 일정한 격리가 유지될 동안 은모는 중식을 사랑할 수 있다. 나는 이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금지는 격리를 위한 사회적 장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 아버지 사이에서 서성이며

중식이 나중에 은모에게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어”라고 말하지만 은모를 향한 중식의 욕망의 시선은 어떤 숏에도 스며든 적이 없다. 이 점을 정한석은 결함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영화의 신들의 보이지 않는 회상 주체를 은모라고 본다면, 그것은 달리 볼 수도 있다. 은모는 금지를 증오하지만 격리가 사라지는 것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금지는 부서질 뿐 사라지지 않지만, 어느 한편에서 금지의 바리케이드를 뛰어넘는 순간 격리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은모가 중식을 사랑할 동안, 중식은 결코 그녀를 욕망의 시선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이것이 은모의 회상으로서의 <파주>에 중식의 욕망의 시선이 등장할 수 없는 이유다.

인상적인 회상장면이 있다. 언니의 죽음(은모의 실수로 인한 사고사이지만 이것은 은모의 은밀한 소망이기도 하다) 이후 가출했던 은모는 돌아와 형부와 다정한 나날을 보낸다. 시장에서 브래지어를 고르던 은모에게 중식이 은모가 말한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들어 보여준다. “이거 아냐?” 극히 암시적이고 간접적인 성적 교류지만 은모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전 장면에서 “예쁜 아가씨가 따라주면 좋겠는데”라고 말하는 노변 찻집 손님의 청을 말없이 들어주던 그녀는(그녀는 중식 앞에서 여자로 불리고 싶다) “아니야”라고 대답한다. 그날 중식이 한때 사랑한 그러나 선배와 결혼한 여자 선배가 찾아온다. 중식은 그날로 내면의 어둠을 씻어내고 여자 선배가 속한 그룹에서 다시 활동한다. 이것은 그 장면을 보이는 대로 설명한 것이지만 여자 선배를 그 자리에 불러온 것은 다름 아닌 은모다. 그녀의 재림이야말로 미소하게나마 위태로워진 격리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식이 수감된 다음날 면회를 간 은모가 유치장 안에서 중식의 맨 다리를 보고 돌아서 인도로 떠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 속 현재에서 중식이 은모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키스했을 때 그녀는 가혹하게도 중식을 다시 감방으로 쫓아보낸다. 그리고 파주를 떠난다. 은모의 모순된 감정에 어떤 논리적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 조금씩 갖고 있는 강박증 환자의 증상이다. 다시 레나타 살레클의 말을 빌리면 “그의 욕망이 대상에 너무 가까이 접근해서 그 결과 대상이 그를 삼켜버리고 소멸시켜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며 “그의 욕망의 대상에의 실재적 대면을 막는 것이 그의 사랑을 살아 있는 것으로 유지하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미뤄온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은모의 무표정은 강박증의 충동을 위장하는 무기력과 무능력의 가면이다. 그 소망은 금지된 사랑과 근친살해를 동시에 꿈꾸고 누명 씌우기도 서슴지 않는 잔혹한 것이지만, 그의 얼굴은 버림받고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떠돌이 짐승의 슬픈 무표정이다. 파주를 떠날 때 은모의 곁에는, 권력과 돈의 아버지인 사장이 모호하지만 깊은 눈길을 보내고 지나간다. 그녀는 그 뒤로도 오랫동안 두 아버지 사이에서 서성일 것이다. <파주>는 더도 덜도 아닌 소녀의 성적 욕망과 강박증에 관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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