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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만성적 분노의 시대
강병진 2009-11-27

내 키는 175cm다. 편집장님보다는 한참 작다. J선배와는 동급이다. 두분이 <씨네21>로 오기 전, 그러니까 전임 N편집장님이 계실 때만 해도 내가 취재팀에서 제일 컸다(전임 편집장님은 재임 시절 자신의 키를 174cm로 밝힌 바 있다).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에 출연한 한 여대생의 “키가 180cm 이하인 남자는 루저(loser)”란 발언에 따르면 <씨네21> 취재팀에서는 편집장님 빼고 다 루저인 거다. 처음 그 발언을 들었을 때는 어이가 없었는데, 이렇게 생각해보니 웃음이 났다. 만약 그녀가 나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였다면 어땠을까. 욕 대신 더 유치한 인신공격을 했을 것 같다. 어차피 영화에서나, TV에서나, 일상생활에서나 외모를 가지고 웃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이 여대생은 요즘 악플에 시달리고 있다. 키가 180cm 이하인 나 역시 빈정이 상한다. 그런데 그녀의 발언이 그토록 분노를 금치 못할 일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의 키가 170cm 정도 되니까 개인적 취향상 남자는 180cm이 넘어야 한다는 거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하필 ‘loser’란 단어를 말했고, 또 하필 <미수다>의 프로듀서가 그 부분을 잘라내기는커녕 아예 자막으로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녀가 “남자라면 적어도 180cm 정도는 돼야 한다”거나, “180cm 아래인 남자는 별로예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그때도 제적 운운하는 댓글이 달렸을까. 싼티 나는 화술을 가진 출연자와 역시 세련된 감각을 얻지 못한 프로듀서가 빚어낸 해프닝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만약 ‘loser’란 단어가 아니라 그녀의 취향이 문제라면, 우리가 분노해야 할 프로그램은 너무나 많다. 매주 잘생기고 잘나가는 남자에게 환호성을 지르는 <골드미스가 간다>는 어떤가. 좋은 자동차를 가진 대학생, 고연봉 회사원을 찾아나서는 <하늘에서 남자들이 비처럼 내려와>도 있다(이건 케이블 방송이라 시청률이 안 나와서 그런 걸까?). 배우 손예진이 세번이나 우승했다는 <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의 ‘이상형 월드컵’이라는 코너도 있다(매주 면박당하는 신봉선이 여자라서 가만히 있는 건가). 어쩌면 분노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너무 예민해진 건 아닐까 싶다. 안 그래도 분노해야 할 일이 많은 시대다. 이 정도 일은 헛웃음으로 넘길 필요가 있다. 분노가 만성이 되면 자칫 뒷목 잡고 쓰러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