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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여자의 일생
김혜리 2009-11-27

레오노르 피니, <비밀의 향연>, 1964, 캔버스에 유채

Leonor Fini,

형형색색의 접시와 사발, 찻잔과 컵이 진열된 그릇 매장을 거니는 여자들의 눈은 은은히 빛난다. 그녀들의 시선은 그릇의 몸체가 그리는 온유한 곡선과 화사한 빛깔, 매끄러운 광택을 음미하는 동시에 그들이 테두리 짓는 동그랗고 움푹한 작은 공간에 담길 향기로운 음식과 행복한 시간을 상상한다. 멋진 구두가 근사한 장소에 데려다줄 거라고 약속하듯, 그릇은 여성을 유혹한다. 넉넉한 그릇과 아름다운 잔을 마련해두면 삶의 포만감이 찾아오지 않을까 꿈꾸게 한다.

레오노르 피니(1908∼96)의 몇몇 그림에는 그릇(형태의 물체)을 앞에 둔 여자들이 등장한다. 또한 피니의 작품에서 여성은 그 자신이 강력한 영적인 힘을 담은 그릇이기도 하다. 백일몽과 변신 모티브를 즐겨 다루고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과 교유한 피니를 미술사는 초현실주의 여성 화가로 분류한다. 하지만 본인은 그 명찰을 거절했다. 앙드레 브르통으로 대표되는 초현실주의 그룹이 성적 욕구의 해방을 주창하면서도 여성혐오증과 동성애공포증을 드러내고 여성 아티스트한테 젊은 뮤즈의 역할만 기대하는 이중성이 그녀의 반감을 샀다. 피니가 그린 여성들은 아마조네스다. 지배적이고 아름다우며 변명을 모른다. 자비를 베풀거나 모성을 표현하는 일은 그녀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종종 피니의 그림 속 여자들은 남자 없이 에로틱한 유희를 벌이곤 한다.

화가, 문인들과 교류하며 파리 예술계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피니는 옷과 치장을 통한 ‘가면놀이’의 달인이기도 했다. 남장을 포함한 독특한 차림으로 각종 모임에 참석했고 파랑, 주황, 빨강, 금색으로 머리를 물들였다.* <비밀의 향연>의 오른쪽 전경에도 풍성한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여인이 앉아 있다. 붉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로 태양과 달의 기운을 한데 품은 여인 앞에는 여성성과 수용성을 상징하는 열 개의 잔이 놓여 있다. 혹시 마법의 약을 제조 중인 마녀일까? 꽃을 닮은 색색의 잔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이 담겨 있을 듯하다. 실을 섞어 베를 짜고 재료를 섞어 풍미를 내는 일, 한 대상에 몰두하기보다 여럿을 엮어 관계를 창조하는 일은 여성의 특유한 재능이기도 하다. 고민에 잠긴 붉은 머리 여성의 뒤쪽으로 벌거벗은 당당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다. 그녀의 손에는 분홍빛 구(球)가 들려 있다. 완벽하게 자족적인 형태의 구는, 온갖 변용의 가능성을 뭉뚱그린 우주의 알처럼 보인다. <비밀의 향연>은 여자의 생애를 함축한 일러스트인지도 모른다. 예쁜 잔을 하나둘 모으며 누군가가 채워주기만 기다리다가 어느 날 방문한 여신에게 그 자체로 완전한 수정구를 선물받는 이야기의 삽화.

*각주: 레오노르 피니는 이혼한 어머니와 둘이 살았는데 혹시 있을지 모를 아버지의 유괴를 피해 다섯살 때까지 사내아이 차림으로 다녔다. 혹자는 이 사실에서 가장(假裝) 취미의 뿌리를 찾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