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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읽기] 그리고, 이미지가 살아 돌아왔다

미완의 역사를 되살리는 알모도바르의 기획 <브로큰 임브레이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이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주제는 한줄기로 모아진다. 예고없이 출몰하는 과거의 이미지들과 느닷없이 대면하기. 영화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 알모도바르는 재차 현재의 시간을 억류하는 과거의 혼령을 특유의 나직한 음성으로 불러들인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그녀에게> <나쁜 교육> <귀향>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두 가지 스토리를 평행적으로 연결시키면서 서사를 짜나간다. 시간의 풍화에 의해 형해화된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남아 수시로 신호를 보내는 이미지를 하나씩 소환하면서, 알모도바르는 불운했던 시절의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시들어가는 남자의 과거로 시간을 되돌린다.

알모도바르의 주인공들이 과거로부터 소환하는 것은 무의식에 잠긴 꿈과 욕망이다. 부조리하고 파쇄된 삶과 화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인 이 영화의 주인공 해리 케인 역시 한 부류이다. 과거 마테오 블랑코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명망 높은 영화감독이었던 그는 딱하게도 시력을 잃은 상태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취택해야 할 눈을 잃어버린 영화감독이란 날개 꺾인 새의 처지나 마찬가지다. 14년 전 당당함이 지나쳐 오만하기까지 했던 해리의 삶을 시련으로 굴절시킨 사건의 베일이 조금씩 벗겨지면서 이야기는 예측 불허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결정적인 삶의 순간마다 동반되는 추락과 존재의 애통함을 묘사하면서 알모도바르는 예술적 영감의 출처를 상실한 자의 낙담을 갱신된 창작의 열망으로 승화하고 있다.

이미지에 대한 페티시즘

여기에 공공연히 깃들어 있는 것은 ‘예술은 예술을 모방한다’는 명제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알모도바르의 이전 영화들에 잠재해 있던 모든 요소들이 종합의 꼴로 모여 있다. 색정광과 마약, 이미지에 대한 도착, 관음증, 음울한 유머, 질투 그리고 살인. 시간의 뒤안으로 사라진 이미지들을 더듬어가며 재구성 작업에 매달리는 해리처럼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영화적 레퍼런스에 대한 재작업에 몰두한다.

이를테면 이것은 ‘알모도바르의 장르 다시 쓰기’라 부를 수도 있다. 그가 영화에 다른 영화를 끌어들이는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조셉 맨케비츠의 모성 멜로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을 빌려왔고, <라이브 플래쉬>는 루이스 브뉘엘에게 받은 영감을 숨기지 않으며, <귀향>의 후반부엔 루키노 비스콘티의 <벨리시마>가 등장한다. 멜로드라마와 서스펜스를 섞고, 누아르의 당의정을 입힌 알모도바르의 최근작은 장르 유희의 혐의를 심심찮게 노출하고 있던 바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그 집대성처럼 보인다.

이 영화에서 이미지에 대한 페티시즘이랄지, 장르간의 구성적 긴장이랄지, 영화사에 대한 제의적 모방은 임계점에 이른다. 14년 전 마테오가 완성하지 못한 영화 <여자들과 옷장>은 알모도바르 자신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초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거대한 강박관념>, 루이 말의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로셀리니의 <이탈리아 여행> 등이 직간접적으로 삽입되어 있다. 영화가 영화를 모방하고, 현실이 영화가 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훔쳐보기에 집착하는 어니스토 주니어의 인물됨은 마이크 파웰의 <피핑 톰>의 주인공 마크에서 따왔고, 어니스토가 레나를 계단에서 밀치는 형상은 존 스탈의 <애수의 호수>의 한 장면을 재연한다. 하지만 다소 뻔뻔해 보이는 베끼기는 이미지 뒷면에 놓인 의미와 맥락을 남겨둔 이미지 자체에 대한 페티시즘이라는 점에서 혼성모방의 냄새가 짙다.

그런 면에서 누구랄 것도 없이 알모도바르의 교과서는 서스펜스의 대가 앨프리드 히치콕이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가장(masquerade) 또는 이중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는 <현기증>적인 테마, 거대한 권력의 볼모가 된 여자를 구출하기라는 <오명>적인 테마(레나에 집착하는 어니스토를 연기하는 배우 호세 루이스 고메즈의 풍모는 <오명>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집착하는 늙은 남편 클로드 레인스를 빼닮았다), 훔쳐보기를 통한 이미지의 재구성이라는 <이창>적인 테마(어니스토 주니어가 완성하려는 몰래카메라 다큐멘터리)를 한몸인 양 품고 있다. 관음의 욕망과 관련해 영화의 첫 장면은 아이러니하다. 처음 열리는 화면은 거대한 눈을 보여준다. 한 여자의 동공 속에 자리한 해리의 모습이 또렷이 보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해리는 장님이다. 그러니까 이건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 영화감독이 가지는 이미지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이미지에 대한 페티시적 집착은 영화의 테마이자 알모도바르의 욕망이고, 내러티브를 종결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이야기하기

알모도바르에 있어서 에둘러 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밀어붙이는 과단성은 근작에 올수록 다소 무뎌진 것으로 보인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에서도 불필요한 군더더기로 느껴지는 산만한 요소들이나 의미맥락의 허술함이 눈에 들어온다. 의미의 질서나 문맥에 대한 경시로까지 보이는 이러한 경향은 삶 전체를 이해하고 책임지는 관계에 대한 불신으로 비치기도 한다. 삶의 세속적 맥락을 무시한 채 빠져드는 은밀한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훌륭한 이야깃거리다. 이와 관련해 감춰진 비밀과 이중 정체성이라는 알모도바르가 즐겨 다루는 또 하나의 테마가 등장한다.

교통사고 이후 해리 케인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 마테오의 이중 정체성, 대기업 총수의 정숙한 비서인 동시에 고급 콜걸로 표리부동한 삶을 살았던 과거 레나의 이중 정체성, 마테오의 수족과 같은 매니저이자 그의 과거 연인이었던 주디트의 이중 정체성, 게이이자 ‘레이 X’라는 새 이름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 나타난 어니스토 주니어의 이중 정체성까지, 겹쳐진 정체성의 모티브가 넘쳐난다. 이 모든 것이 스토리상의 잉여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모든 작중 인물들이 가지는 ‘비밀’이다. 비밀은 처음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인물들 각자가 떠맡고 있었던 비밀이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커다란 원을 그린다. 알모도바르의 모든 인물들에게는 그들의 고유한 삶이 있다. 그리고 그 삶에는 은밀하게 숨겨진 미스터리가 있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이 신비를 훼손하지 않은 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숨가쁜 시간 전개를 현란한 점묘화로 빚어낸다.

<브로크 임브레이스>는 다양한 장르가 하나의 몸체로 융합되어 있어 다 보고 나면 서로 다른 장르의 영화를 세편쯤 본 듯한 인상을 남긴다. 못 이룬 사랑을 강조하는 멜로의 정취가 지나쳐 스릴러적인 아이디어가 희생되었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서사가 단선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모도바르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현저한데, 평이하게 펼쳐지던 이야기에 예기치 않은 순간 이질적인 화소(話素)가 끼어들어 전체의 톤을 변화시킨다. 그때부터 서사는 꼬일 뿐 아니라 인물들의 화행의 경로도 변칙적으로 굴절된다. 요컨대 그의 영화는 한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의 모체가 되고, 그것이 새로운 깊이를 만들어내면서 짐작할 수 없는 이야기의 증식이 발생하는 유기체의 면모를 가진다. 알모도바르가 즐겨 사용하는 영화 속 영화도 종종 이런 효과의 진앙지가 된다. 영화로 영화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감독은 자기애적 성찰의 단계에 접어든다. 그런 의미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실체가 누락된 허깨비 이미지에 열광하는 모방범의 영화가 아니라, 영화가 또 다른 영화의 질료가 되는 이미지에 대한 도착의 영화다.

시네필적 헌신에 바탕하는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의 욕망이 얼마나 가열찬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너나없이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이야기꾼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영화에는 세명의 감독이 존재한다. 본래가 작가이고 영화감독이기도 한 해리가 첫 번째 감독이요, 복화술사를 고용해 입술을 읽어가며 레나와 해리의 러브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어니스토가 두 번째 감독이고, 계모의 뒤를 밟아가며 자신만의 다큐멘터리를 완성해가는 어니스토의 아들 레이 X가 세 번째 감독이다. 심지어 해리의 집필작가 노릇을 하는 디에고까지 <도나 상그레>라는, 헌혈센터에 위장 잠입한 흡혈귀에 관한 이야기를 상상해내고는 흥분에 겨워한다. 집요한 이야기하기의 열망은 해리에게 매듭짓지 못한 이야기의 완성을 부추긴다.

그러므로 레나와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해리의 집착은 실은 영화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투사된 과잉 동일시로 볼 수 있다. 레나에 대한 애정의 강도는 걸작을 만들고 싶은 해리의 열망에 비례한다. 이를 입증하는 장면은 널리 산재해 있다. 해리가 레나를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그저 얼굴이나 보여줄 요량으로 사무실에 온 그녀를 처음 본 순간 해리는 “나를 미치게 만든 존재”에게 미끄러지듯 빨려든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얼굴에 대한 페티시적 몰입을 시각화한 이 클로즈업은 표면의 테마에 불과한 사랑의 완성을 이면의 테마인 유예된 영화의 완성으로 연결한다. 디에고가 찢긴 조각 사진을 맞춰 사진 한장을 구성하는 장면도 풍요로운 메타포를 제공하는데, 영화감독은 개개의 조각난 사진을 맞추듯 흩어진 필름을 조립해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이다. 필름은 조각인 상태로는 쓰레기더미에 불과하지만 적절한 조립에 의해 마술적인 예술작품으로 둔갑한다.

고다르의 영화와 닮은 그 장면의 까닭

메타영화로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현실로부터 한편의 허구적인 영화를 창작하기까지 영화감독의 여정을 보여준다. 도입부에서 해리는 아서 밀러와 그의 감춰진 아들의 이야기를 구상 중인데, 아버지에게 존재를 부정당한 아들의 복수를 요체로 한 그의 새 작품은 어니스토와 어니스토 주니어의 관계, 해리 자신과 그의 감춰진 아들인 디에고의 관계 등으로 전이되어 하나의 복선이 된다. 영화 전체가 해리가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창작에의 열정은 시각장애인 영화감독을 치유한다. 한 인간의 내면을 병들게 하는 상처와 분노, 기억을 쓰다듬는 치유의 힘은 근자에 알모도바르 영화의 활력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 영화에서 치유의 촉매가 되는 것은 죽음 직전 이미지의 부활이다. 전작 <귀향>이 그러하듯 <브로큰 임브레이스> 역시 사자(死者)의 귀환을 소망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혼령의 영화다. 다만 이 영화에서 부활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이다. 이미지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죽음에 봉인된 이미지를 되살려내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생환 또는 부활이 중요하다. 극장에서 상영되고 생명을 다하는 것이 영화의 운명이라지만, 이미지는 결단코 사라지지 않는다.

고지식한 다큐멘터리스트 레이 X의 캠코더에 담긴 비밀의 문을 여는 순간 해리는 시간에 봉인된 이미지, 자신이 잃어버렸으며, 그대로 두었다면 소실되었을지도 모르는 이미지를 되찾는다. 그 이미지에는 교통사고가 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나눈 해리(마테오)와 레나의 유별나지 않은 키스가 담겨 있다. 보통의 연인들이 일상처럼 나누는 키스로 보이는 그 이미지는 죽기 전 레나가 느낀 최후의 감각을 보여준다. 어두운 거리를 지나며 흔들리는 차 안에서 찍은 까닭에 조각난 사진을 이어붙인 것마냥 깨어진 것으로 보이는 그 이미지는 투박하지만 신비로운 영기를 뿜는다. 알모도바르의 카메라는 점자 책을 손으로 감촉하듯 그 ‘깨어진 키스’(broken embrace)의 이미지를 어루만지는 해리의 손 실루엣을 길게 잡는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이 하나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달려온 영화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그것이 죽은 이미지를 되살리는 집념에 대한 영화가 되는 것, 그래서 찬란했던 이미지의 영화(榮華)에 대한 영화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어떤 죽음은 때로 새로운 생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알모도바르의 기획은 결손이나 미완으로 남은 역사를 되살리는 것이다. 영화사의 죽은 이미지들에 대한 생환의 기획으로서 알모도바르의 영화는 마지막에 장 뤽 고다르를 모방한다. 그런 까닭에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채우는 ‘깨어진 키스’의 화상이 고다르의 <프레농 카르멘>의 한 장면을 모방한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다. 알모도바르는 이처럼 시간에 봉인되었던 이미지의 생환을 매우 시네마틱한 방식으로 묘사한다. 10여년 전 미완으로 남았던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과정에 관한 영화를 만들면서, 그는 우리가 단 하나의 이미지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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