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김영진의 점프 컷
[김영진의 점프 컷] 그저 이런 청춘도 귀엽지 않니

별다른 야심 없이 이물감 없는 유쾌함을 주는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 <나는 곤경에 처했다!>

곧 개봉할 소상민의 <나는 곤경에 처했다>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화제를 끌었고 뉴커런츠상을 받은 작품이다. 제도권 영화교육기관인 영화아카데미의 졸업작품이고 CJ엔터테인먼트에서 배급한다. 영화아카데미는 내가 알기론 가장 혹독하게 학생들을 몰아붙이는 학교이다. 세계 어느 영화학교에서도 졸업생들을 경쟁시켜 한해에 네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내게 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이런 시스템으로 작품을 다량생산한다는 것이 흥미로운데 12월10일에 CGV 극장 라인을 통해 <나는 곤경에 처했다>를 비롯한 네편의 장편이자 졸업작품이 배급된다고 한다.

그중 <나는 곤경에 처했다>를 먼저 봤으므로 이 영화에 대해 뭔가 말하려고 한다. 신춘문예에 가작으로 입선한 경력이 있는 시인이자 스스로는 백수라는 것에 대해 자각심을 더 가진 선우가 이 영화의 주인공인데, 여자친구 유나에게 실망스러운 행동을 보이다가 차이고 난 뒤 벌어지는 상황을 따라간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쉽게 홍상수를 떠올리는데, 홍상수 영화에 비해 등장인물들이 훨씬 어리다. 그들의 사랑도 불륜의 범주가 아니라 연애와 실연의 범주에 놓인다. 주인공 선우에게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처럼 충성도 높은 여자도 없고 불륜을 저지를 배짱도 없다. 선우의 애인 유나는 시를 쓰는 그를 존중하는 듯이 보이지만 술주정을 부리는 그에게 잘난 시 쓰느라 어쩌고 하면서 빈정거린다. 무슨 까닭인지 그에게 관심을 보이고 접근한 선배의 여자친구와 격한 섹스를 나누기도 하지만 슬그머니 그 집에서 도망쳐나와 사태의 전말을 눈치챈 선배에게 사과하다가 빌붙어 살던 선배의 집에서 쫓겨나기도 한다.

홍상수 영화를 닮은 듯 닮지 않은

여러모로 홍상수 영화, 특히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일부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나는 곤경에 처했다>에는 있다. 선우가 대학 동창들의 모임에 갔다가 은근히 왕따를 당하며 노골적으로 변호사인 동창에게 조롱당하는 장면도 그렇다. 영화 초반에 애인 유나에게 절교당한 선우가 끝내 그 관계에 매달리며 끊어질 듯 이어가는 지리멸렬한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홍상수 영화에서의 어떤 비약의 순간 같은 것이 이 영화에는 끼어들 틈이 없다. 표면을 집요하게 따라가다가 문득 등장인물 내면의 축적이 외부세계에 투영되면서 고양되는 영화적 깨달음의 순간이 홍상수 영화에는 있지만 당연히 이 영화는 그런 영화적 목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 영화의 미덕은 상당한 감각을 지닌 감독의 대사 구사력과 그 효과로 발생하는 유머감각에 있다. 퍽 재미있게 구성된 인물들의 대사에서 우디 앨런의 영화를 떠올리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정도로 도시적 히스테리에 가득 찬 농담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보다는 최근 몇년간 종종 나온 20대 감독들의 청춘영화 계보에 더 가까운 영화일 것이다.

<나는 곤경에 처했다>는 젊은 세대의 일상적 리얼리티를 다룬다는 태도로 다른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내러티브와 스타일로 채워진 노동석의 <마이 제너레이션>류의 청춘영화의 특징과 기저가 상당히 비슷하지만 유머가 전경화돼 있다는 개성을 갖고 있다. 이 영화에서의 유머는 대부분 주인공 선우를 비롯한 등장인물이 자기의 욕망과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의 논리적 일관성을 꿰는 데 실패하면서 발생하는 효과다. 이를테면 영화 초반에 선우는 여자친구인 유나가 자기 아버지와 셋이서 밥을 먹자는 제안을 할 때 거절하지 못하고 승낙했다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데, 전화로 아프다고 변명했던 선우의 방을 카메라가 풀숏으로 잡으면 전날 밤 선배인 승규와 질펀하게 술자리를 벌여 늦잠을 잔 것이 드러난다. 방 안에서 빈둥거리다가 걱정이 돼서 찾아온 유나에게 선우는 모든 걸 들키고 만다. 장면이 바뀌면 어느 동네 놀이터에서 선우가 무릎을 꿇고 절교를 선언한 유나에게 사과하고 있다. 앞서 거론한 대로 선우는 이후로도 무릎 꿇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게 되는데 누나라고 불렀던 선배의 여자친구와 관계를 맺고 난 다음 선배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는 것이다. 이 친구에게는 자존감이 없다. 시는 그가 특별할지도 모른다는 최면이자 환상의 탈출구, 또는 구실일 뿐이고 그가 사는 패턴은 그저 현재를 모면하면서 술이나 마시며 뭔가 열중할 것을 찾는 일뿐이다. 영화 말미에 우연히 찾아온, 자신이 뜻밖에도 용감하다는 것을 여자친구 유나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증명한 뒤에 그가 자신감을 되찾고 뭔가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도 피식 웃음이 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뛰어난 대사 구사력과 유머감각이 장점

단자화되고 왜소해진 개인, 예술을 꿈꾸지만 그 자신에게나 남들에게나 확신을 주지 못하는 삼류 시인이라는 주인공의 운명은 젊음에 대해 우리가 상투적으로 강요하는 그런 정서구조가 이 세대에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이 영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유머 코드로 품었기 때문이지만 거기에 통렬한 자기 조롱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저 이런 인간도 귀엽지 않습니까, 라고 묻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여기에 어떤 숭고나 고양, 반영, 아이러니의 느낌이 배어 있지 않더라도 등장인물은 충분히 귀엽다. 이것도 현실에 개기는 하나의 삶의 방법론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수습되지 않는 삶을 열심히 수습하려고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도 자그마한 해방이다. 그걸 용기나 열정의 부족이라고 폄하하는 것도 어긋난 충고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주인공 선우는 자신의 짧은 확신대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영화 말미에 걸어가는 선우와 유나의 뒷모습은 그렇게 활기차 보이지는 않는다. 얕은 언덕길을 천천히 올라가는 그들의 발걸음이 주는 인상이 그렇다. 다만,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인다. 이런 것도 이 세대의 삶의 지표를 드러내는 영화적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산의 한계 탓도 있겠지만 스타일 상으로도 별다른 야심이 없어 보이는 이 영화가 이물감 없는 유쾌함을 전해준다면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 선우는 주변에 나를 너무 갈구지 말아주세요, 라고 말하는 듯한 행동으로 살아간다. 필요하다면 서슴없이 무릎을 꿇고 가끔 어깃장도 놓지만 그 이상으로 뭘 해낸다는 것도 없다. 선배에게 사과한 뒤에 선배의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오자 다시 그 집에 찾아가서는 자존감 운운하며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어 달라는 여자의 말에 슬그머니 침대에 누워 여자를 더듬는 이 남자의 캐릭터는 어떤 기왕의 범주에도 묶이지 않는 인물의 개성을 드러낸다. 소상민이 어떤 감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야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어 있지 않은 태도로 인물과 상황을 만들어내는 재기는 흥미롭다. 이만한 규모의 영화라면 거듭 만들어내도 흥미로운 세대의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음 영화가 벌써 궁금하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