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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록만화, <벡>
2001-12-13

기타 줄을 물어뜯어도 알 수 없는 것

해롤드 사쿠이시는 내게는 제법 신비로운 만화가이다. 그 신비란 ‘추앙’이라기보다 ‘미스터리’에 가깝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그의 대표작 <고릴라맨>(학산문화사 펴냄)은 고단샤 만화상을 수상할 정도로 일본 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수상스럽지만 강한 남자 ‘고릴라맨’을 주인공으로 한 학원 액션물로, 예상을 살짝살짝 빗나가는 개그 터치에 독특한 청춘물의 뉘앙스도 겸비하고 있어 나 역시 즐겁게 읽었다. 90년대 후반 국내에 번역되어 나오자 당연히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했는데, 이상스럽게도 그들은 이 책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일진회’ 파동을 만들어낸 <로쿠데나시 블루스>(최근 ‘비바 블루스’라는 제목으로 정식 번역), <오늘부터 우리는> <상남 2인조> 등 비슷한 계열의 만화들이 해적판으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는데도, 이 만화는 유독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무엇 때문일까? 내가 볼 때 이 만화가 훨씬 재미있는데. 왠지 무덤덤해 보이지만 사람의 뒤통수를 치는 묘한 솜씨가 깃든 작품인데. 결국 그 ‘독특한 뉘앙스’가 학원 액션물의 주독자인 청소년들에게는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빨리 때리고 싸워야지, 왜 싸우는 척하면서 엉뚱한 곳으로 가버리는 거냐?

<고릴라맨> 이후 사쿠이시는 <사바나의 하이에나>라는 전혀 엉뚱한 스타일의 만화로 나아갔다. 다소 투박해 보이지만 농밀한 그림체는 사라지고, 복고적이고 유아적인 만화체로 동물들의 수상한 모험을 그려나갔다. 생각많은 만화가의 퇴행적 탈출 정도로 여겼다. 그리고 판단을 유보했다. 정반합의 원리로 다음 작품이 이 만화가의 본질을 드러내줄 것이다. 하지만 최근작 <>을 만나면서 이 만화가의 정체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어갔다.

누더기 개 ‘벡’, 삶의 방향을 틀다

<>은 평범한 소년 유키오가 기타와 록음악을 만나면서 서서히 로커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소재 자체는 과거의 사쿠이시적인 ‘청춘물’을 구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미끈한 주인공들은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고릴라맨>의 농밀함 대신에 나타난 얄팍한 신인 만화가 같은 그림체 때문에 만화가의 이름을 두세번 확인해야만 했다. 초반부터 등장하는 수영복 엿보기 장면은 혹시 이 만화가가 <아이즈>나 <비디오 걸> 같은 소년 연애담을 그리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자아내기도 했다. 눈에 거슬리는 어설픈 동작, 안이한 칸 나눔, 적당한 인물배치 때문에 실망감을 느낄 때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꾸준히 이 작품을 읽어가는 데는 어떤 미련, 혹은 어떤 희망 같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증거들 역시 없지 않다.

이 만화에서 ‘벡’은 뮤지션 벡(‘Loser’의), 혹은 제프 벡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유키오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으로 접어들게 만든 누더기 개의 이름이다. 벡은 유키오에게 별로 친절하지도 않고 뭔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단지 벡을 음악의 길로 끌어들인 일본계 미국인 친구 류스케를 만나게 해준 계기일 뿐이다. 하지만 그 외모 자체의 수상함은 평범할 수 있는 뮤지션의 성장담에 독특한 미스터리의 요소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작품이 진행되면서 류스케 역시 매우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에서 그 개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은 어떻게 보면 록이라는 소재를 전형적인 소년만화의 틀 속에 부어넣은 것으로도 보인다. 전통적으로 록이라는 소재를 즐겨 사용한 것은 여성 만화가들이다. 특히 80년대 소녀만화 속에서 청춘의 낭만과 반항의 상징으로 흔히 발견된다. <토이>(아쓰시 가미조, 서울문화사)에서 잘 드러나듯이 그 주인공들은 신비한 능력의 존재들이고, 외모에서부터 천재성과 신성함이 배어 있다. 그들은 70년대 록의 3J처럼 요절의 운명을 타고난 듯 보인다. 하지만 <>의 유키오는 지극히 소년만화적인 주인공이다. 평범하고 우둔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물’을 만나 활개친다. 모든 장애들은 모두 그의 성장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이다. 주변에는 끊임없이 유혹의 여자들이 등장하고, 그녀들의 눈요기가 필요 이상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그는 소심하고 순수한 면모를 잃지 않는다. <>은 <토이>나 <고릴라맨>에 비해 분명히 어린 소년 독자들을 위한 만화다.

사실상 록음악을 좋아하는 만화 독자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을 읽어나간다면 커다란 불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흥분시킬 만한 순간들이 차근차근 마련되어 있다. 가볍게 바둑만화 <고스트 바둑왕>을 보고, 가볍게 테니스만화 <저스트 고고>를 읽듯이 말이다. 하지만 <고릴라맨>의 매력에 빠졌던 독자들은 아무래도 그 흔적을 찾게 마련이고, 이 만화의 에피소드 곳곳을 연결하는 개그 묘사들에서 그 잔재들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부족하다. 좀더 깔끔하고 좀더 세련되고 좀더 상쾌해 보이는 무엇을 찾으려 애썼는지는 몰라도, 우리를 매료시켰던 그 둔탁함과 그곳에서 슬며시 삐져나오던 야릇한 감성이 사라졌다.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