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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점프 컷] 좀더 역동적이었으면

에너지의 배분은 섬세하나 멜랑콜리한 청춘영화의 한계를 남긴 <회오리바람>

나는 장건재 감독의 <회오리바람>을 CGV 무비콜라쥬 상영 때 소개하기 위해 봤다. 밴쿠버영화제에서 상을 탔다는 소문으로만 듣던 영화였는데 청춘기의 억압과 해방을 다루는 에너지의 배분이 꽤 섬세하게 조율된 영화라는 인상을 받았다. 상영 때 만난 장건재는 자신감이 충만한 젊은 감독이었다. 자신이 통제한 영화언어에 깊은 자부심을 표하면서 1억여원의 예산이 든 <회오리바람>이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금을 받아 예상보다 규모가 더 커진 경우이며 다음 영화부터는 더 작은 규모로 자주 찍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독립영화라고 부르는 유형의 영화에 맞는 창작자 정신을 지닌 감독으로 자신이 장악할 수 있는 영화예술의 형태에 대해 명확한 그림을 갖고 있었다.

2주 전 <씨네21>에 <회오리바람>을 밴쿠버영화제에 초청한 토니 레인즈는 비평가이자 영화제 관계자로서 이 영화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세심하고 따뜻한 호의가 묻어나는 평론을 썼다. 그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을 비롯해 장건재가 영화 속에서의 움직임을 정확히 통제함으로써 청춘기의 사랑과 실연이라는 평범한 스토리를 어떻게 비범하게 연출했는가를 지적했는데 별로 이의를 달고 싶지 않은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첫 장편영화를 연출했지만 수많은 단편영화를 촬영한 경험이 있는 장건재에게 토니 레인즈가 말한 ‘통제’의 미덕은 경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아직 신인이라 불리는 감독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어떨지는 모르지만 나는 거꾸로 장건재가 통제를 통해 장악하는 영화언어의 결이 더 넓고 풍부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회상구조로 극적 클라이맥스를 만들어낸 까닭

<회오리바람>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조는 연대기순을 살짝 비틀어놓은 회상구조이다. 영화는 회오리바람 같은 사건, 남자주인공인 김태훈이 박미정과 함께 겨울여행을 다녀온 지 3개월 뒤부터 시작한다. 그들이 여행을 다녀왔을 때 그들은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다. 예상할 수 있는 대로 양가 부모들은 난리가 났고 특히 박미정의 부모님은 거의 패닉상태에 빠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듯이 보이는 박미정의 아버지가 김태훈과 김태훈의 부모를 부른 자리에서 절제된 권위를 과시하는 듯하다가 칼을 들고 패악질을 부리는 해프닝이 있은 뒤 태훈은 중국음식점 배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미정은 엄마의 인도에 따라 얌전하게 보습까지 마치는 학생이 되어 있다.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뒤에도 태훈은 미정을 잊지 못하고 미정은 태훈을 잊으려 한다. 이때쯤 영화는 그들이 좋았던 순간, 곧 그들이 함께 겨울여행을 떠나 몸과 마음을 섞을 뻔한 순간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현재와 과거가 정교하게 엮인 채로 제시돼 있다. 중국음식점 배달일을 하다 오토바이 사고를 내고 일을 그만둔 뒤 수중에 든 현금을 다 털어 미정에게 줄 목걸이를 산 태훈이 가족들이 전부 외출한 텅 빈 집으로 들어와 라면을 끓일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 미정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이게 어찌된 일이지, 라고 관객이 잠깐 반문하는 사이에 그들은 연인들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을 누리고 심지어 섹스를 할 뻔도 한다. 그들이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도중에 마치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듯이 태훈이 다니는 학생부 지도교사의 냉혹한 얼굴이 화면에 잡힌다. 다음 화면은 오전 늦게까지 자고 있는 태훈의 부스스한 잠자리 모습을 보여준다. 몇개의 시간대를 점프한 이 구성은 별다른 굴곡이 없는 이 영화의 구성에 나름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만들어준다. 선생에게 끌려가 학교에서 체벌을 받은 뒤 태훈은 다시 학교를 빠져나오고 학교 뒷산을 정처없이 헤매는데 장면은 다시 겨울바다를 즐겼던 태훈의 회상장면으로 끝난다.

요컨대 태훈의 내적 횡단을 드러내는 이 장면의 구조들은 현실의 억압과 기억 속의 해방이라는, 에너지의 분출을 오직 잠시나마 허락당하고 이후로는 기억 속에서 소진해야 하는 한국 사춘기 청소년의 불우를 극적 리듬으로 끌어올린다. 그때까지 이 영화에서 에너지의 상승과 하강은 사건 속에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태훈이 중국음식점 배달일을 하면서 누리는 오토바이 질주의 제한된 속도감 속에서만 관객에게 느껴진다. 이는 토니 레인즈가 절찬한 움직임의 배분, 두 차례 반복되는 오토바이 질주 몽타주 장면이기도 하다. 물론 그 장면들이 태훈의 내적 억압과 분출이라는 기제를 효과적으로 표상하는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영화 후반부의 회상장면이 정교하지만 인위적으로 배치된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한국의 청춘은 정말 우울하기만 한 것일까

이 정도로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장건재가 재능있는 감독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다만 그의 자신감의 발로에 격려를 보내면서도 다음 영화에서는 좀더 내적으로 생성되는 상승의 리듬이 가능할 수는 없을까 묻고 싶어진다.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대다수 청춘영화에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시기의 젊음은 늘 멜랑콜리하게 다뤄진다. 정체돼 있고 우울하고 사방에서 포위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그렇게 우리 대다수가 보냈고 다음 세대들이 통과하고 있는 시기인 것은 맞지만 청춘기의 희로애락에서 긍정적인 것은 상당수 누락돼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영화에서 태훈은 부모와의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또래와의 관계에서도 과묵하다.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는 느낌을 준다. 그는 여자친구의 부모에게 당하고 PC방 사용료를 아끼려다 동네 양아치들에게도 당하며 배달일 하며 느끼는 스트레스의 반작용으로 오토바이 액셀을 밟았다가 사고를 내고 피해자 아저씨에게 설설 긴다.

이런 것들이 외재된 사건의 전부라면 결국 반작용으로 드러날 것은 영화 초반에는 드러내지 않았다가 후반부에야 펼쳐 보이는 겨울여행의 추억밖에 없다. 과연 그럴까, 나는 약간 의심이 들었다. 진부하지만 무례한 예를 들자면 프랑수아 트뤼포의 그 방면의 고전 <400번의 구타>에서 인상적인 것은 영화 후반부의 그 유명한 해변가 트래킹 숏, 주인공 앙투안 드와넬이 끝없이 달릴 듯한 느낌을 주는 질주장면 말고도 영화 내내 줄곧 돋을새김처럼 각인된 아이들의 달리는 장면이다. 그 영화에서 아이들은 뭘 하고 있어도 금방 질주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청춘의 본성에 속하는 약동의 흔적이 영화 전체의 화면에 퍼져 있는 것이 사회 전반의 억압을 다루는 플롯의 사건들과 맞물리면서 정중동이 고르게 삼투돼 있다는 느낌을 준다. <회오리바람>도 비슷한 계열에 있는 영화이지만 컷수가 좀 모자란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태훈의 입장 외에 여주인공 미정의 내면을 스케치할 만한 화면도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물론 장건재는 플롯의 사건 외에 주인공들이 천천히 걷거나 뛰거나 이런저런 몸동작을 취하는 데서 영화의 공기를 모으는 능력이 있는 감독이다. 이는 토니 레인즈가 칭찬한 그대로다. 이 영화에 좀더 기대한 것이 많았던 나로서는 장건재가 그런 능력을 더 밀고 나갔어도 좋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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