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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의 인디라마] 상처를 품은 도시의 표정을 보다

전주의 발견- 박동현 감독의 <기무>, 전규환 감독의 <애니멀 타운>

<애니멀 타운>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상영된 두편의 다른 장르의 영화를 소개하겠다. 한편은 다큐멘터리로 박동현의 첫 장편 <기무>다. 다른 한편은 전규환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애니멀 타운>이다.

전규환은 벌써 세 번째 영화 <댄스 타운>을 거의 찍어, 첫 번째 영화 <모짜르트 타운>과 함께 ‘타운 3부작’의 완성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무슨 3부작 운운하는 걸 좀 우습게 생각하는 편인데 <애니멀 타운>을 보고 그의 3부작을 모두 보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처음 공개된 <애니멀 타운>은 서구의 일부 영화제에서 호평받았으나 한국에서 열린 국제영화제에서는 죄다 떨어진 작품이다. 전작 <모짜르트 타운>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재능에 비해 과하게 구박받은 전규환이라는 감독에게 느끼는 호감 때문이다. 그는 빠른 속도로 영화를 찍고 있으며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무>와 <애니멀 타운>은 각기 다른 장르의 영화인데도 묶어 소개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이 영화들은 모두 우리의 삶과 사회에 묻힌 상처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대개 가장 안이하게 떠도는 말로 상처를 겪으면 인간도, 사회도 성숙한다고 한다. 그건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상처를 겪으면 인간도, 사회도 거기서 헤어나기가 힘들고, 상처로 내파된 부분을 감추고 겨우 버티게 된다. 상처를 딛고 일어서자는 투의 성의없는 말에 기대기보다는 상처를 직시하는 게 괴롭더라도 차라리 현명한 일이다. 고통스럽지만 상처의 기원과 확산을 자각하는 게 우리를 약간은 더 강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곧 사라질 그래서 더 무서운 <기무>

<기무>는 한때 기무사 건물이었던, 지금은 현대미술관 터가 된 공간의 역사성을 탐구하는 다큐멘터리다. 영화의 상당 부분은 조선 왕조의 종친부였고 식민지의 근대화된 병원이었으며 한때 보안사라 불리던 기무사 건물로 쓰인 이 건물의 역사적 가치를 조망하는 데 바쳐진다. 건축학자를 비롯한 전문가의 해설이 덧붙는 동안 카메라는 건물의 외관과 내부를 천천히 탐색한다. 화면에는 이 건물이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름을 바꿔가며 존재한 역사적 정황들이 자막으로 깔린다. 이 영화가 근엄하고 미적인 탐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은 숨가쁘게 짧은 상영 시간 동안 버텨내면서 끄집어내려고 하는 어떤 흔적이다. 공적인 역사적 기록과 별개로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마모되어 흔적이 없는 것을 카메라가 안간힘을 쓰며 마치 초혼제라도 지내는 양 불러내려고 하는 듯한 기운은 이 영화에 이상한 영적 분위기를 입힌다.

그렇더라도 물론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기무>에서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는 것은 그때부터다. 영화는 갑자기 옛 기무사 건물과 아무 상관없는 서울의 퇴락한 골목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우리가 전혀 몰랐던 역사적 건물의 시간성을 공들여 탐색한 뒤 동시대의 서울 거리를 카메라가 헤맬 때 파괴와 해체의 전개 과정은 동시대에 가공할 정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자각하게 된다. 이윽고 카메라가 움직임을 멈추고 어느 허름한 동네 골목길에 버티고 서서 오랫동안 그 골목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런 논평없이 지켜보고 있을 때 우리가 무심하게 지워가는 삶의 흔적, 동네라는 개념이 살아 있는 공동체의 살아가는 순간들이 잠시나마 충만한 형태로 존재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동네 사람들이 저녁 찬거리로 뭘 준비하고 있는지까지 알 수밖에 없는 동네 골목길의 스킨십이 지금 지워지고 있는, 곧 사라질 상처의 일부분이 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움이 드는 것이다.

기묘한 서스펜스 보여주는 <애니멀 타운>

맥락은 전혀 다르지만 전규환의 <애니멀 타운>도 화면 곳곳에 상처의 기운을 품은, 그럼으로써 일상적으로 지각되지 않는 도시의 다른 면을 건져올리는 영화다. 아동성범죄 전과자와 작은 인쇄소 사장의 일상을 번갈아 병렬하는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삶의 관련성이 드러나는 것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다. 별다른 설명이 없는데도 비상한 긴장감을 갖고 두 인물의 일상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 이 영화의 힘이다. 특히, 아동성범죄 전과자 오성철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감독의 방식이 특이한데, 그는 가스도 수도도 공급되지 않는 곧 철거될 아파트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며 건설현장을 전전하다 택시회사에 취업한다. 먹고사는 문제 외에도 그는 매 순간 자신의 범죄충동을 억누르며 힘겨워하는데 이 기묘한 서스펜스는 우리에게 그를 혐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동정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이 동정은 우리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운데, 이는 어떤 알 수 없는 불행을 겪은 뒤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이는 인쇄소 사장의 생기없는 삶과 대조적이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 다 현세의 삶을 저당잡히고 간신히 살아내기는 마찬가지인데 한 사람은 시시각각 엄습하는 고통에 자신의 신체기관을 다 열어두고 있는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감각기관을 닫아둔 듯이 행동한다. 습관적으로 교회에 간 인쇄소 사장은 목사의 설교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목사가 낚시 때 잡은 커다란 물고기들을 선물로 양동이에 담아주자 그것들을 싣고 오다 대로변에 버리고 퍼덕거리지도 않는 죽은 물고기를 냉정하게 응시하며 담배를 피워 문다. 마치 자신의 몸과도 같은 그 물고기들의 죽음을 자학적으로 즐기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그에 비해 성범죄자 오성철은 공황장애에 시달리며 한시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버티지 못하고, 수시로 형사를 비롯해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된 범죄자와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듯이 유령처럼 살아가는 인쇄소 사장은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유형의 상처로 괴로워한다.

<애니멀 타운>에서 반복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그 상처다. 영화에는 범죄자 오성철이 난방이 되지 않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박박 씻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데, 이 장면 때문에 나중에 오성철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다시 모종의 범죄를 저지르고 난 뒤 한적한 학교 운동장 수돗가에서 찬물로 피투성이가 된 상반신을 닦으며 울먹일 때 관객은 이상한 느낌에 휩싸이고 만다. 슬프다기보다 처절하게 다가오는 그 느낌은, 오성철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천형처럼 벗겨내기 힘든 그의 삶의 주홍글씨가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학교 수돗가에서 몸을 다 씻고 난 오성철이 어느 소녀를 발견하고 따라가는 것으로 이어지는 장면, 그를 보고 수상하게 여긴 학교 경비가 오성철을 따라가자 오성철은 건물 뒤편에서 오줌을 누고 있다. 오성철은 “죄송합니다. 너무 급해서요”라고 말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지극히 불행한 사건의 복판에서도 참을 수 없는 생리작용이 빚은 해프닝을 보여주는 이 장면은 오성철 몸의 주홍글씨를 우스꽝스러운 비극으로 다시금 각인하는 잔인함을 감추고 있다.

더 잔인한 것은 이런 일들이 이 도시에서는 일상의 편린으로 숨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는 느닷없이 도시에 출몰한 멧돼지들로 아수라장이 된 상황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 화면이 반복적으로 전해지는데 대다수 사람들이 뉴스로 접하는 이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일상에 침입한 실제 사건이듯이 <애니멀 타운>의 두 주인공이 겪는 개인적인 거대한 비극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우리 일상의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일 수도 있다는 대비가 이 영화를 더욱 섬뜩하게 만든다. 영화는 도시에 출몰한 멧돼지 때문에 벌어지는 다소 난폭한 상황으로 종결되지만 감독은 (그는 실제로 멧돼지를 도시에서 봤다고 이 영화 상영이 끝난 뒤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서 주장했다) 곧잘 인위적인 영화의 상황에서 도시가 주는 보편적인 상처의 흔적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 두 주인공이 겪는 상처보다도 그들의 상처를 무심히 품은 도시의 표정을 찍어내는 데 이 영화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 없는 무명의 감독이 찍은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꼼꼼하게 묘사하는 세공력을 보여준다. 음악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밀어붙이는 그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아마 좋은 감독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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