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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그 마음이 바로 ‘시’
윤성호(영화감독) 2010-06-18

발 딛고 사는 땅의 사람들을 애착하는 만화와 영화 3편을 보다

역사만화 <히스토리에>

정말 본질적인 문제들까지 투표로 개선하긴 어렵겠지만 그나마 세상의 종말을 조금이라도 늦출 기회가 몇년에 한번씩 우리에게 주어지는 셈이라면, 그만큼 천천히 업데이트되고 (거의 1년에 한권씩) 그보다 두근거리는 만화 시리즈가 하나 있다. <기생수>와 <칠석의 나라>의 작가인 이와아키 히토시의 역사만화 <히스토리에>. 배경은 알렉산더 이전의 유럽, 주인공은 터전을 잃고 발칸반도를 전전하는 스키타이계 그리스 소년 에우메네스. 심성과 수완이 좋은 주인공은, 원래 카르디아의 명문가에서 유복한 양자로 자랐으나 동족인 노예가 탈주하는 사건을 계기로 그 자신도 모르던 출신이 폭로되어,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이 이곳 저곳을 유랑하게 된다. 그 와중에 아리스토텔레스와도 엮이고,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인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의 호감을 얻는 등 우리가 예전에 즐기던 무협소설에 신밧드의 모험이 얽힌 듯한 플롯이 진행되는데, 단 이 작가는 주인공의 영웅담보다는 그이에게 살갑게 손도 내밀고 먹을거리도 나눠 먹는 보통 사람들을 그릴 때, 그리고 그 모둠의 가치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를 묘파할 때 더 발군이다. 가령, 떠돌이였던 그를 흔쾌히 구성원으로 받아준 고마운 농경민들의 공동체를 이웃 성의 호전적인 부족이 위협했을 때, 이 다윗을 닮은 소년이 일부러 몸에 상처를 내고 (고육지계) 혈혈단신 적진으로 향하는 동안의 막막한 몽타주와 내레이션.

‘다에로, 용케도 날 거둬줬지. 그러지 않았다면 난 해변에서 쓰러진 채 굶주리다 그대로 죽었을지도 몰라. 베나 아줌마, 적은 재료로 용케 그런 맛있는 요릴 만드시지. 특히 그 따뜻한 수프가 최고야. 따뜻한 거라면 제드. 그 겨울날 일부러 모피까지 갖다주고…. 그렇게 추운 날 다같이 술도 마셨다. 코란네 포도는 정말 최고, 그런데 정작 코란은 술을 못 마시지. 반대로 구스는 어릴 때부터 술고래였어. 구스의 아버진 참 대단하셔. 뭐든지 척척 다 만들고. 그 치밀한 기술엔 그리스인도 기절초풍하겠지. 그래! 난 이 마을에 오고 나서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가치관, 다른 문화를 알게 됐다. 동료에 넣어줘서 정말 고마워, 다들! 걱정마, 괜찮을 거야! 모두 살아남을 거야!’ - Hitoshi Iwaaki <히스토리에> 4권 중에서 에우메네스의 독백

요렇듯 독자를 북돋우는 게 이런 영웅 서사물의 전형적인 수법임을 알면서도 지난 몇년 이런저런 감상이 겹쳐서인지 괜히 마음이 뜨끈해진다. ‘죽여야 할 것’들이 아닌 ‘지켜야 할 것’들을 되뇌이는 자세. 어차피 잘 안될 걸 알면서도 일보 이보 전진하고 가라앉고 인질이 되었다 다시 풀려나고. 적이 미워서가 아니라 옆의 누군가들이 소중하고 예뻐서 그 친구들과 계속 함께하고픈 마음으로 (아니면 자신은 떠나더라도 그 공동체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에) 식량을 비축하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밤새 어두운 연못을 건너는 마음. 이 잡스러운 설명을 1음절로 압축하면 ‘시’.

단편영화 <이십일세기십구세>

인디포럼2010에서 최아름 감독의 단편 <이십일세기십구세>를 관람했다(감독이 일부러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제목). 고3인 나루는 쉬는 시간이 되면 그대로 책상에 엎드린 채 고개를 모로 뉘여 역시 같은 자세로 늘어져 있는 친구 다림과 축축 처지는 대화를 나눈다. 생리 삼일째라 쩐다는 나루에게 다림이 건넨 면 생리대는 부착이 여의치 않아 교복치마를 피로 물들이고. 한편 한달째 컨디션이 좋지 않은 다림에게 깐깐한 담임 장민경은 참고 견딘 뒤의 뿌듯함을 강권하며 조퇴를 허락하지 않고, “장민경 딸은 왕 불쌍하겠다”, “진심 끔찍, 인정” 뒷담화하는 학생들. 결국 앰뷸런스에 실려간 친구의 빈자리를 역시 모로 누워 보며 울컥한 나루는 나름 매직으로 여러 번 고쳐 쓴 격문을 학교 게시판에 붙이지만 학생들은 모의고사 가채점 등수표에 몰린다. 대신 그녀를 지도실로 호출하는 낡은 스피커. 꿀꿀한 표정으로 기성품 생리대를 사러 마트에 간 나루는 역시 생리대 쇼핑을 하는 담임 장민경과 그녀의 딸을 마주쳐 머쓱 인사를 나누고 (장민경도 ‘사람이었네’) 이어 집에서 꺼낸 면 생리대는 연꽃처럼 기지개를 편다(그러니까 ‘우리의 적이 어떻게 하면 악으로 인식될 수 있을까 하는 강압적 질문에 대한 상징적 대답’ 같은 거). 다시 돌아온 수업시간. 선생님도 학생도 덧없이 잠을 청하는 교실. 화장실을 다녀오는 나루의 눈앞에서, 종이학을 접던 친구는 남학생의 프러포즈를 받고, 누군가는 단 음식을 양껏 먹고, 안경을 쓴 친구는 문제집을 찢어 불태우고, 다른 친구들은 실로폰과 기타로 화음을 넣고, 또 다른 아이들은 아예 교실 한가운데 침대를 놓고 퍼질러 앉아 만화를 본다. 카메라 셔터 소리에 맞춰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단 한명의 이탈도 없이 모두가 책상에 고개를 파묻은 기이하고 안쓰러운 풍경. 그리고 나루는 아무도 없는 방송실로 향하는데…. (두둥)

고백하자면 이 단편을 사전에 모니터를 통해 보면서 별다른 감흥을 얻지 못했다. 청소년을 다룬 단편에서 흔히 등장하는 억압의 기제와 아직은 어눌한 배우들의 연기, 뭔가 판을 갈아보겠다는 활력으로 나가지 않은 채 주저하는 화면들. 그러나 서울아트시네마 어두운 객석에서 다시 본 이 단편은, 말 그대로 영화, 그러니까 극장에서 잠자코 볼 때 온전한 감상이 가능한 영.화. 16분 내내 목소리 톤 한번 올리지 않은 심심함은, 뭔가 한 방 내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그러니까 섣부른 파격과 가짜 명랑함을 경계하며 차라리 자신과 친구들의 속절없던 시간을 은은하게 애도하는 마음이었던 것. 어떤 무기력증에 관한 은유나 그걸 일깨우려는 괜한 독촉이 아니라, 삶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대부분 책걸상에 볼모 잡힌 채 지내온 동기들 옆에 같이 머리를 파묻고 “나는 이 스크린 안에서 거짓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며 바깥으로 마이크를 내미는 제스처. 이번 달에 감상한 두 번째 ‘시’.

장편영화 <>

마침내 이대 안에 있는 극장에 가서 이창동 감독의 <>를 보았다. 처음의 몇 장면을 보며 ‘나도 누가 믿고 따라와주면 저런 신들을 연출할 수 있을 텐데, 나도 제대로 애도받지 못한 어떤 여학생에 관한 꽤 묘한 내러티브의 단편을 만든 적이 있는데’ 하며 마음으로 까불었다(잠깐 졸기도 했다). 그리고 양미자의 시가 낭송되고, 아네스가 그 시를 받아 읊고, 늦었지만 반갑다며 백구가 컹컹거리고, 아이구 누나 왔다고 아네스의 동생이 버스 창 밖에서 경주를 하고, 살구가 떨어진 밭을 지나, 도로를 지나고 개울을 지나 아네스가 고개를 돌려 둥근 얼굴로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봐줄 때, 속절없이 눈물이 터져나왔다. ‘어머 이 아저씨’ 하며 난감해하는 옆 사람 때문에 나 역시 난감하고, 그렇게 영화가 암전되고,

캐스팅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 나는 머리를 박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 어떤 회한에 대해 나도 가해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 땜에 / 영화관을 나와서도 갈 데 없는 길을 한참 걸었다 -황지우 <일 포스티노>

‘시’라는 제목의 영화. 영화로 나온 ‘시’. 이 고마운 형용모순(들). 예술이 또 다른 인문장르에 대한 경외감을 지닐 때, 아니 그보다, 발 딛고 사는 땅의 사람들을 애착할 때, 그리하여 여러 번거로움을 무릅쓸 때, 세상 많은 아픈 심신을 애도하고 또한 고양시킬 수 있다는 증거로서의 ‘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