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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벽이 많기도 하지
2001-12-19

<핑크 플로이드의 벽>

왜 이렇게도 글을 쓰기가 힘든 걸까?

영화를 본 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PC 앞에 앉은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좀체 글이 써지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느낌. 어서 빨리 저곳으로 가야겠건만 이놈의 벽은 좀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다.

결국 밉상스러운 허연 모니터 화면을 뒤로 한 채 집을 나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우산으로 받아가며 목동을 거닐었다. 얼마 전에 이사온 탓인지 이 동네는 조금만 걸어도 낯설고 어색해진다. 큼직큼직한 아파트들 사이로 인적은 드물고, 간간이 모여 있는 상가들. 모두 지루할 만큼 닮아 있다. 그나마 나무들이 그 흉흉한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려주고 있어서 덜 삭막해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리 포근한 느낌은 아니다.

이전에 살던 동네는 한 바퀴 돌기 적당한 거리였는데 1단지, 2단지…. 계속 돌다보니 지루해진다. 동일한 회색의 벽들에 번호만 계속 높아져갈 뿐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듯한 기분.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옛 동네가 그리워졌다.

이사오던 때 이사갈 집이 공사중이라서 며칠을 친척집에서 보내야 했다. 집을 비운 지 이틀 뒤 우편물을 가지러 집에 들렀는데 새로 이사온 사람들이 짐을 막 올리고 있었다.

그때 참 기분이 묘했다. 뭐랄까? 바람맞은 기분이랄까….

이틀 전에 내가 그곳에 살았건만, 그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집이 되어버리는 모습이 너무도 야박하고 속상하고 미웠다.

열여덟해를 함께 보냈는데,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초등학교 시절 설레던 첫사랑의 기억도 그렇게 함께 했건만, 그놈의 집은 어느새 다른 사람을 너무도 쉽게 받아주고 있었다.

그렇게 야속했던 옛집을 생각하면서 투덜투덜 걷다보니, 너무 멀리 와 있었다. 다시 돌아가기엔 맘이 영 내키질 않아서 지나가던 마을버스에 몸을 실었다.

좁다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창 밖으로 멍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영화 속 학교장면이 떠올랐다. 일렬로 함께 기나긴 복도를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아이들. 그리곤 어딘가로 떨어져서는 보기에도 흉측한 소시지가 되어 나오는 장면.

무표정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는 사람들과 어둑해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빗줄기로 더욱 회색빛 가득해보이는 아파트들을 보니 절로 영화 속 답답스런 화면들이 연상되었던 것일 게다.

그리곤 알게 되었다. 내가 왜 그렇게 글을 쓰지 못하고 헤매고 있었는지를….

사실 <핑크 플로이드의 벽>을 골랐을 때만 해도 나름대로 큰 포부가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을 짜부라트린 것도 모자라 소말리아까지 건드리고자 한다는 미국이란 거대한 벽에 대고 벽치기를 좀 해보려고 했던 것이었는데, 그만 영화를 보고는 내 황량한 마음에 갇혀버린 것이다.

2001년 첫 시작을 맞이할 때만 해도 나름대로 포부도 컸고, 배우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건만, 돌아보니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

뭔가 깨달았던 것 같아 걷다보면 이전의 그 벽 안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내 모습을 만나게 되고, 뭔가 잡은 것 같아서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날아가버려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이렇게 달력종이 한장만을 남겨놓고 말았다. 영화 속 핑크의 모습마냥 초점 없는 눈빛에 누구의 말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황량한 마음 모양새를 하고 그래도 뭔가 해보겠다고 발버둥치다 제풀에 자빠져서 이렇게 한참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나에게 여행이 필요하다는 것, 쉬어야 한다는 것,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나를 막고 있는 연약함과 나약함의 벽들, 그리고 자신없음과 게으름의 벽들, 그 벽들을 깨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영화 속 마지막 벽이 깨어지는 장면처럼 통쾌하게 나의 맘의 벽들이 산산이 부서져내렸으면 한다. 그래서 이젠 핑크의 지겹도록 딱딱한 표정이 아닌 상쾌한 아멜리에의 표정을 한 내 맘을 갖고 싶다.

그나저나 남에 집에 들어가서 들쑤시고 다니는 그 덩치 큰 놈은 어쩌란 말인가?

암튼 세상엔 참 벽이 많기도 하다. 민동현/ 단편영화 <지우개 따먹기> <외계의 제19호 계획>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