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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수 틀린 항의 분별없는 분노
2001-12-21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1988)이 개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말 대형 흥행물에 밀려 극장을 잡기 어려운 데다 기독교계의 항의가 예상돼 극장들이 기피하고 있다는 게 수입사 코리아준(대표 정준교) 쪽의 설명이다. 지난 98년 이 영화를 수입해 개봉하려다 미뤄온 정 대표는 “이제 우리 사회도 이 정도의 작품을 소화할 수 있다고 본다”며 “다음달 12일에는 반드시 개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 작품과 관련해 지난 3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상영저지운동을 펴겠다”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영상물등급위원회(영등위)의 인터넷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기독교인들의 항의 메일이 1000건 이상 날아들었다. 인터넷 포털 `다음`에도 이 영화에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의 카페가 열려 있다.

기독교인들이 이 영화에 대해 분노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다른 사람에 의해 비틀린 모습으로 그려졌다면, 그에 대해 분노하고 항의하는 건 정당하다. 그러나 이번 일에서 보인 일부 기독교인들의 행동에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없진 않다.

먼저 영등위에 항의하는 건 번지수가 틀렸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영등위는 문자 그대로 영화 비디오 등 영상물의 `등급`을 정하는 민간자율기구이지, 예전의 공연윤리심의위원회같은 국가 검열기관이 아니다. 여기에 대고 “상영금지판정을 내려달라”고 요청하는 건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다. 어떤 영화가 아무리 밉더라도 그 영화의 상영 여부를 국가의 힘에 의지해 검열하거나 상영을 금지하도록 하겠다는 발상은 이젠 버려야 할 낡은 사고다.

또 한가지는, 메일을 쓴 이들의 절대다수가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신문에 난 요약만 보고 분노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줄거리를 써버리는 건 제작자와 관객 모두에 실례이므로 자세히 말하진 않겠으나, 이 작품이 ‘예수가 성행위도 했고 아이도 낳고 살았다’는 주장을 하려는 영화는 결코 아니다. 그렇게 이해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정신구조가 매우 특이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작가와 감독의 문제의식은 신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어봤음직한 고민이다.

메일을 보낸 이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영화 한 편 보고 나서 기독교에 대해 편견을 가질 관객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런 우려는 관객을 바보 취급하는 관점에서 나온 것이다.

분노해야 할 대상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터뜨리는 분노는 설득력이 없을 뿐 아니라, 안타깝게도 분노하는 이들을 매우 즉흥적인 집단으로 보이게 만들 수 있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