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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꿈같은 각성, 그 영화적 쾌락

지각의 새로운 방법을 영화적으로 고민한 <리미츠 오브 컨트롤>

짐 자무시의 <리미츠 오브 컨트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분석을 읽는 것보다 그 세계를 여러 번 경험하는 쪽을 택하는 게 맞다. 통제를 거부한다고 선언한 영화를 어쨌든 틀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비평은 필연적으로 영화를 충분히 끌어안지 못할 것이다. 명상 앞에서 떠드는 말은 그저 소음일 뿐이다. 하지만 비평의 사랑스러운 어리석음이 있다면, 그건 영화의 비밀을 밝히지 못해도 비밀의 주변에 끝내 머무르려는 욕망을 뿌리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이 글이 영화에 대한 단정이 아닌, 애정을 담은 질문을 더하는 것으로, 그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히면 좋겠다.

영화의 환각은 반복의 환각

이 영화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을 종종 접한다. 하지만 영화가 일목요연하게 이야기를 제시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안에 이야기가 없다고 말하는 건 실은 보는 이의 노력과 감각의 문제일 때가 더 많다. 영화는 그 무엇보다 직관에 의지하지만, 그 직관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있는 무엇이 아니라(그러니까 말초신경이 아니라) 훈련을 반복하면 터득되고, 그 과정에서 미지의 영역을 발견하는 것이다. 감성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길게 하는 이유는 <리미츠 오브 컨트롤>이 어쩌면 훈련의 영화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어떤 훈련? 정한석은 이 영화에 대해 지각의 경로를 바꾸는 “주관성 훈련”이라고 표현했는데(<씨네21> 766호),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는 건 이런 것이다. 그 훈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영화는 무엇을 향해 스스로를 어떻게 연마하고 있는가? 짐 자무시가 “나는 진심으로 어떤 점에서 환각 유발제와 같은 종류의 영화를 만들기를 원했다”고 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감독의 말을 받아들여 이 영화의 환각성을 인정한다면, 그건 약의 힘으로 현실을 망각하고 초현실로 단번에 접속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새롭게 지각하는 법을 아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세상이기보다는, 새롭게 지각하는 법에 대해 영화적으로 사유하고 탐구하려는 자들을 위한 세상이다. 그걸 위해 지금 자무시가 영화 안팎으로 보여주고, 들려주고, 강조하는 것은 반복의 훈련, 그것의 중요성이다. 이 영화의 환각은 반복의 환각이다. 환각의 반복과는 의미가 다르다. 요컨대, 반복의 형식을 공고히 세우되, 그 형식에 지배되지 않기, 반복을 경험하되 동시에 지켜보기. 그 과정에 무엇이 있고, 그때 반복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이를 읽는 것이 고독한 남자(이삭 드 반콜)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다.

물론 이 영화를 쉽게 읽고 싶은 유혹이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긴 하지만, 등장인물들의 입에서 ‘미국’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싶어진다. 이를테면 마을의 아이들이 고독한 남자에게 “당신은 미국 갱인가요?”라고 묻고, 남자를 감시하듯 따라다니는 헬리콥터를 향해 어느 소년이 “미국 거예요!”라고 소리치며, 마침내 등장한 임무의 표적 빌 머레이의 숨겨진 이름이 ‘미국인’임을 엔딩 크레딧이 알려줄 때, 이 영화는 명징해진다. 지금 이 세계의 알레고리? 미국이라는 빅 브러더? 하지만 이건 어떤 의미이기보다는 그냥 짐 자무시의 농담이다. 미국이라는 상투성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고독한 남자가 휴대전화도, 총도 사용하지 않고 섹스도 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장르의 상투적인 선택을 물끄러미 바라볼지언정,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는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고독한 남자 앞에 등장하는 세 번째 여인이 나름의 분자론에 대해 남긴 알쏭달쏭한 말들도 정색하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약간의 힌트 정도로 여겨도 될 것이다. 개개인은 엑스터시 안에서 도는 분자들의 조합이라거나 분자들의 배열에 의해 낡고 오래된 것이 새것이 될 거라는 논리에서 주목할 말은 분자가 아닌, 분자들의 배치다. 항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항과 항의 관계가 흥미롭다는 것. 엑스터시는 무언가의 내용이 아니라 항들의 배열에 의해 생긴다는 것. 익숙한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모든 건 상상된 것이다

고독한 남자의 첫 번째 접선자인 바이올린 남자는 말했다. “모든 건 인식에 의한 것이다.” 그의 마지막 접선자인 멕시코인도 말했다. “모든 건 어떤 안경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모든 건 상상된 것이다.” 이들의 말을 영화적으로 형상화한 장면은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남자가 그림에서 바이올린을 보면, 다음 장면에서 바이올리니스트가 나오고, 남자가 여인의 누드화를 보면, 실제로 그런 여인이 나타난다. 말하자면 상상하면, 현실이 된다. 내가 무언가를 보고자 하면, 볼 수 있다. 고독한 남자 앞에 차례로 등장하는 사람들, 혹은 사물들, 아니, 어딘지 사람 같지 않고 사물 같지 않은 존재들, 즉 바이올린, 누드, 금발, 분자, 기타, 멕시코인(이 명칭은 내가 지은 것이 아니라 짐 자무시가 엔딩 크레딧에 올린 것이다) 등은 남자의 상상의 산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의식이 타자를 만든다. 그의 응시가 타자를 존재하게 한다. 그가 수련을 하는 것처럼 기이한 몸짓을 반복할 때, 그건 흰 종이를 삼키고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처럼, 마치 무언가를 이루려는 의지의 몸짓처럼 보인다(김기덕의 <빈집>에서 투명인간이 되기 전에 유사한 몸짓을 하던 그 남자가 떠오르는 건 나뿐일까). 남자의 의지가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이 타자들은 결국 이 남자의 자기 복제적인 분신들일까? 영화가 되풀이하는 ‘현실은 자의적이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라는 말은 결국 이 의식의 주체에게 수렴되는 말일까? 우스운 비유이긴 하지만, 고독한 남자는 머리카락을 뽑아서 분신들을 만드는 머털도사인가?

그게 환각의 황홀한 점이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라는 영화의 반복된 문구를 주체성의 강화로 읽으면 안될 것이다. 우선 이 영화에서 경이롭다고밖에 표현할 길 없는 고독한 남자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대사도 별로 없고 표정도 없는 이 남자의 얼굴은 의미를 담지 않은 텅 빈 얼굴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 것이다. 그의 얼굴은 그 무엇도 하려고 하지 않는 얼굴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얼굴이다. 위에서 언급한 분자 여인의 방식으로 말한다면, 매 숏을 채우는 그의 얼굴은 그 자체로는 개별성이 없는 매번 똑같은 분자다. 이 분자가 어떤 배열에 놓이는지에 따라 거기에 감흥이 찾아온다. 어떤 배열? 타자들의 배열. 남자의 얼굴의 반복에 차이가 생기는 건(혹은 그렇게 우리가 믿는 건) 그 앞에 나타나는 타자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그 타자들은 인간일 수도 있고 사물일 수도 있다.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고, 그림일 수도 있고, 풍경일 수도 있다. 이 영화 안에서 우리가 만난, 그 모든 존재일 수도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들의 위상에 차이가 없다는 것, 분자 여인의 말처럼 “우주에는 중심도, 변방도 없다”는 사실이다. 배열은 중요하지만 거기에 통제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건 인식의 문제라고 영화가 말할 때, 주체의 인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인식을 넘어서는 지점, 원래의 인식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그 잉여의 지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잉여의 자리에 존재하는 것, 아니 그 자리를 마련해주는 건 영화 속 타자들이다. 영화가 그걸 사유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은 이 영화가 시선의 영화처럼 보일 때다. 시점이 아니라 시선이다. 그러니 앞서 언급했듯, 고독한 남자의 응시가 타자를 존재하게 만든다는 식으로, 즉 그를 이 영화의 응시의 주체로, 나아가 이 영화 전체를 그의 환각의 시점 숏, 그의 상상(계)으로 여긴다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뭔가 공평하지 않다. ‘고독한 남자가 무언가를 본다’가 아니라 ‘여기에 시선들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싶기 때문이다. 만약 영화 속 타인들의 존재가 남자의 상상의 결과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중요한 건 그 사실이 아니라, 그 이후다. 그렇게 그의 눈앞에 살아난 타자들, 그의 응시를 받은 타자가 이제 그를 바라본다.

예술의 시간을 끌어안고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고독한 남자는 바라보인다. 응시의 대상이 된다. 이 영화가 그걸 극단적으로, 매우 신비롭게 형상화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가 미술관에서 그림들을 바라보거나 건물 옥상에서 시가지의 풍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에서다. 그때, 그가 무언가를 보고 있는 느낌이 아니라, 그림이, 풍경이 그를 응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타자의 응시가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와 그의 응시를 결박하거나 매혹하거나 위협하는 것 같다. 어떤 암시가 아니라 영화가 그 장면을 정말로 그렇게 찍었다. 갑자기 등장해서는 그에게 성냥갑을 건네주고 어느새 사라지고 마는 타인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남자의 응시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독한 남자의 응시로 의미를 부여받는 존재라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서 남자를 응시하는 순수한 시각성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고독한 남자의 상상력이 통제 밖으로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고독한 남자의 상상의 결과물이 그의 상상을 넘어서는 지점을 보는 게 중요하며, 그것이 이 영화 속 환각의 정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바꿔 말해 그가 통제하지 못하는 그 상상의 잉여, 타자의 응시는 그의 시간에 새로운 차원을 부여한다. 자기 동일시적인 시간이 아닌, 나의 시간 안에 들어온 타자의 시간. 새로운 거리를 찾아 걷고 또 걷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지나고, 낡은 건물들을 쳐다보고, 광장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며, 타인의 시간을 유랑하는, 아니, 시간의 환각에 빠지는 그의 형상은 산책하는 자의 그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한 건 영화의 거의 마지막, 고독한 사내의 목표물이자 여정에 종지부를 찍을 ‘미국인’이 등장하는 순간이다. 일단 느낌으로만 말하자면 이 부분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달리 자꾸만 현실세계를 흘깃거리는 것 같다. 미국인이 자신을 죽이러 온 고독한 사내에게 던지는 말들도 앞선 장면의 모호함을 떠올린다면 직설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음악, 영화, 보헤미안, 과학 같은 것들을 믿는 환각에 취한 것들, 세상의 실재와는 아무 상관없는 것들” 같은 말들. 그러므로 고독한 남자는 예술의 상상력을 옹호하기 위해 그걸 믿지 않고 억압하는 초자아, 혹은 시스템을 살해하는 것이다, 라고 해석하는 건 어딘지 상투적이다. 영화가 그의 여정을 매 순간 자기목적적으로 느껴지게 만들어놓고, 굳이 최종 목표를 마지막에 세워둔 이유를 납득하기가 쉽지 않다. 단지 최소한의 장르의 운용을 위한 선택이라고 보아야 마땅할까. 자무시가 뭐라고 대답할지는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 이 부분은 장르적 선택이나 현실의 알레고리와도 별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해 보이는 건, 고독한 사내가 환각과 상상의 여정을 통해 체화한 타인의 시간(결국 예술의 시간!)을 끌어안고서 거대한 동일자와 대결한다는 점이다. 그가 온전히 상상의 힘만으로 끝내 그 자리에 왔을 때, 그는 더이상 임무를 수행하는 장르의 주인공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러나 예술이라는 보편성을 구현한 남자처럼 보인다. 대결을 끝낸 남자를 태운 차가 헤드라이트의 어렴풋한 빛에 의지해서 어둡고 황량한 땅을 빠져나올 때, 그 순간의 감동을 대체할 언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최고의 영화는 꿈같지”

그러나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고독한 남자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성냥갑 속의 흰 쪽지를 꺼낸다. 그는 처음으로 그 쪽지를 삼키지 않고 손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쳐다본다. 마지막으로 미술관을 방문한 그는 마치 구겨진 그 흰 쪽지가 확대된 듯한 작품을 들여다본다. 이전의 그림들이 그를 응시하는 느낌을 주었다면, 이번에는 그가 작품을 바라본다.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를 생각한다. 그런 다음 화장실에서 그간 입었던 양복을 벗고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여정을 함께 했던 짐을 로커에 넣고 쓰레기통에 성냥갑 속의 그 흰 쪽지를 버린다. 그가 역의 문을 빠져나갈 때, 불현듯 영화가 끝난다. 그러니까 영화가 고독한 사내의 상상의 여정에서 끝나지 않고 뭔가 직접적인 행위(목표물 살해)를 하게 한 뒤, 기어이 현실로 돌아오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 남자의 마지막 선택(이를테면 흰 쪽지를 먹지 않고 버리기)을 두고 가상에서 현실로의 복귀라고 말하는 게 온당하기는 한가. 분명한 건, 이 후반의 시퀀스로 가기 전에 영화가 멈췄다면, <리미츠 오브 컨트롤>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영화 전체를 어느 고독한 남자의 긴 꿈이라고 보고 싶다. 그 꿈을 지탱하는 상상, 환각, 응시, 그리고 타자의 존재는 예술의 근원이다. 자무시는 그 꿈을 소중히 여긴다. 자무시가 그런 꿈을 영화적으로 형상화는 방식은 더없이 시적이고 매혹적이다. 그에 비해 현실성이 어른거리는 후반의 시퀀스들은 어딘지 덜컹거리고, 어찌 보면 지나치게 직접적인 발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 이 영화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된다. 자무시는 영화적인 오해를 무릅쓰고서라도 기어이 그 자리에 도달해야만 했을 것이다. “꿈들이 갖는 심리학적 근원을 찾아가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꿈들이 깨어남에 가져다주는, 그러나 이성이 보통 경시하는, 속담 같은 눈짓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그 눈짓들을 포착하는 일이 목표이다.” 오래전 아도르노가 베냐민의 꿈에 대해 한 이 말을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 돌려주어도 괜찮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독한 남자를 찾아온 신비로운 금발 여인(틸다 스윈턴)은 “최고의 영화는 꿈같지”라고 말했다. 꿈같은 영화, 그것은 꿈의 내용이 우리를 도취하게 만드는 영화가 아니라, “꿈들이 깨어남에 가져다주는 눈짓”을 통찰하게 하는 영화다. 그러니 자무시가 고독한 사내의 마지막 발걸음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건 그저 그런 현실로의 복귀도, 영화적 타협도 아니라, 강건한 예술적 각성이다. 지금, 영화가 다른 무엇에 기대지 않고 오직 그 자신의 고요한 이미지와 리듬만으로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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