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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영화의 연인이고 싶었던
김용언 2010-09-13

마르그리트 뒤라스 영화제, 9월13일부터 서울 씨네코드 선재에서

<나탈리 그랑제>

<인디아 송>

경고 혹은 당부. 장 자크 아노의 영화 <연인>으로, 그리고 그 영화 속 제인 마치의 특정한 이미지만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안다고 (대개는 얼굴을 붉히거나 킥킥 웃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 것. “나는 모든 것이에요. 나는 캘커타이고, 거지이며, 메콩강이고, 직위이기도 해요. 캘커타 전부죠. 백인 구역 전부고요. 식민지 전체예요. 모든 식민지의 쓰레기통이 바로 나예요. 그건 확실해요. 나는 거기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에서 태어났고 그곳에 대해 썼어요.”(<말의 색채-마르그리트 뒤라스가 말하는 나의 영화들> 중 도미니크 노게즈와 인터뷰)

작가이자 감독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1914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지금의 베트남)에서 태어났다. 18살에 프랑스로 왔고,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의 프랑스 점령을 경험했으며, 레지스탕스로서 또는 프랑스 공산당원으로서 활발히 활동했고, 29살에 첫 소설 <철면피들>을 발표했고, 45살에 알랭 레네의 데뷔작 <히로시마 내 사랑>의 각본을 쓰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감독으로서 데뷔작은 1967년, 53살에 완성한 <라 뮤지카>였다. 이후 17년 동안 그녀는 20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폴린 카엘과 조너선 로젠봄 같은 열렬한 지지자는 소수에 그쳤다.

오는 9월13일부터 19일까지 서울 씨네코드 선재에서 상영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 영화제 ‘목소리’에서는 총 5편의 영화가 상영된다. 뒤라스의 첫 번째 장편 <파괴하라, 그녀는 말한다>(1969)는 이후 그녀의 영화들이 보여줄 특징의 상당 부분을 배태하고 있다. 시골의 외딴 휴양지 호텔에서 만난 네명의 남녀는 제각기 사회적인 고민 혹은 사적인 고통에 침잠해 있다. 그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욕망의 연쇄고리는 출구를 찾지 못한 채 폐소공포증에 가까울 정도로 제자리에서 맴돌 뿐이다. 제한된 공간에서 이어지는 말과 감정의 자리바꿈 놀이는 68혁명 직후의 복잡미묘한 분열증을 암시한다. <파괴하라, 그녀는 말한다>가 캐릭터 묘사와 심리에서 뒤라스 특유의 접근법을 보여준다면 <나탈리 그랑제>(1972)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미 완성된 정교한 스킬을 보여준다. 식사를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뜨개질을 하고, 마당을 치우는 일상적 가사노동을 권태롭지만 정확하게 수행하는 두 여자가 있다. 이들의 일상은 라디오에서 지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살인범 추적에 관한 불길한 뉴스, 잘못 걸려온 전화벨 소리, 순진하고 소심한 세탁기 외판원(‘청년’ 제라르 드파르디외의 걸출한 연기!) 등으로 산발적으로 분산되지만, 이 커다란 시골집의 각 요소가 흔들림없이 제자리에 위치한 것처럼 이 여인들의 일상도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이 공간 안에서 맴돌 뿐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걸작 <인디아 송>(1975)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영화적 체험을 선사한다. 1930년대 인도 캘커타의 프랑스 대사관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나른한 관능과 당도한 죽음과 몰락에 대한 불안과 모호한 노스탤지어가 뒤섞인 러브 스토리. 안느 마리라는 욕망의 대상과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가 번갈아 등장하지만, 놀랍게도 배우들은 단 한마디의 대사도 읊지 않는다. 대신 몇명의 여성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비선형적인 독백을 주고받고, 그 독백은 때로 영화 속 장면과 조응하지만 대부분은 평행하게 흘러간다. 이미지와 사운드의 불일치는 오히려 영화적 공간과 사건을 확장시키며 관객의 상상력을 맘껏 자극한다. 촬영보다도 사운드트랙이 먼저 녹음된 매우 희귀한 예로서, 배우들은 녹음된 목소리를 들으며 그에 맞춰 장면 속에서 자신들이 취할 제스처를 결정했다고 한다. 뒤라스의 말년을 지켰던 35살 연하의 연인 얀 안드레에게 끊임없이 사랑의 말을 건네며 죽음과 부재를 고찰하는 <대서양의 남자>(1981), “모르는 것만 배우기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다”는 7살 아이(실제로는 40대 배우가 연기한다)의 등교 거부로 시작하여 인생이라는 불가해한 경험에 대한 존재론적 사유를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아이들>(1984) 역시 놓치지 말 것을 권한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현재 가장 주목받는 미술가 양혜규의 전시 <셋을 위한 목소리>와 함께, 양혜규가 뒤라스의 원작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직접 각색·연출해 무대에 올리는 공연도 마련된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http://cafe.naver.com/artsonjearthall)를 참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