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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8월30일~9월7일
김혜리 2010-09-24

<옥희의 영화>

영화의 약점이 내 눈에 지나치게 크고 뚜렷해 보일 경우, 수사(修辭)가 수사를 부르는 잡지 글쓰기 속성상 판단이 둔탁해지기도 한다. 그 위험을 피하는 한 방법은, 내가 좋건 싫건 감독이 최초에 품었을 최선의 의도에 입각해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인데 <라스트 에어벤더>는 그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동석한 다른 사람들은 샤말란의 최고작으로 <언브레이커블> <빌리지> <싸인>을 꼽았다. <식스 센스>는 한표도 얻지 못했다.

8월30일

일기를 쓰기로 한다. 나의 일기가 아니라 영화의 일기다. 영화관의 어둠에 잠겨 수천만 번째 태초의 빛이 스크린에 떨어지길 숨죽여 기다릴 때마다 나는 다시 한번 살아보기를 결심하고 있다는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 영화에 아무런 기대가 없을 때조차. 그래서 영화의 일기를 쓰기로 한다. 영화를 보는 마음이란, 격류에 밀리고 내던져지는 오갈 데 없는 피조물의 기분인 동시에 살아 있음을 가장 능동적으로 실감하는 고양된 상태다. 영화, 우리의 대낮 같은 밤, ‘데이 포 나이트’(Day for Night). 이것은 그저 영화를 보는 자의 출납부와 비슷한 기록이 될 것이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쩌면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다른 건 몰라도 얼기설기 진술을 마치면 고바야시처럼 다리를 절며 심문의 방을 황급히 빠져나갈 것만은 분명하다.

8월31일

이달 개봉하는 <옥희의 영화>에 관하여 홍상수 감독을 인터뷰했다. 어려운 대화였다. 그는 단어로 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영화가 살아 있는 무언가와 비슷한 물건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극중 이선균의 대사는, 홍 감독의 육성으로 들린다. 스탭 네명, 촬영회차 13회. <옥희의 영화>는 머릿속에 그려놓은 영화를 현실로 옮기는 일반의 길을 따르지 않고, 최선을 뽑아낼 수 있는 상태로 창작자의 감각을 조성한 다음 때마침 앞에 놓인 대상에게 다가가는 홍상수적 방법론을 거의 선정적으로 실천한다. 다만, 철학이나 추구하는 영화의 최종적 꼴과 뗄 수 없는 그의 제작방식을 다른 감독들에게 저예산 제작의 모범 사례로 권장하는 일은 난센스다.

홍상수는 인간의 내적 활동을 대기 중에 상존하는 ‘오염’으로부터 지켜야만 보존되는 연약한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영화 만들기 과정에서 ‘배양’한 구조들을 통해 그것을 방어해왔다. <옥희의 영화>는 그림풀이가 불가능한, 적어도 평면 도형을 통한 도해를 요리조리 피해나가는 구조를 지어올렸다는 점에서 과격하다. 이 작은 영화는, 홍상수 필모그래피의 모든 전작을 갑자기 A로 뭉뚱그린 다음 A의 여집합이 되어버렸다. 총 4편으로 구성된 <옥희의 영화>는 통상 전시회나 음악회에 속하는 체험을 불러온다. 갤러리에서 한점의 그림은 그 다음에 관람할 그림에 관한 일정한 기대를 조성하고 다음 그림이 감상자에게 일으키는 파장은 앞의 그림이 불러일으킨 기대를 어떻게 충족시키고 배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교향곡의 각 악장은 다른 악장과의 관계에 의해 부단히 위상을 바꾼다. <옥희의 영화>의 네편도 그러하다. 이 작법은 위험을 무릅쓰고 인물에까지 적용된다. 우리가 보는 인물/실체는 공기 중에 떠돌던 원소들이 특정 순간 그 자리에 엉겨붙어 이룬 우연한 형상이다. 홍상수 감독 왈, “포지션은 영구적이지 않다”. 난데없이 소설 <제5도살장>에 등장하는 외계인 트랄파마도어인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시체를 보면 죽은 사람이 바로 그 순간에는 나쁜 상태지만 다른 많은 순간들에는 아주 양호할 수 있다고 믿는 종족이다.

9월1일

심심한 아이 손에 들린 요요처럼, 생각이 자꾸 <옥희의 영화>로 돌아간다. 친구 K와 오래간만에 통화했는데 화제가 요즘 어떤 영화가 볼 만한가로 흘렀고 이야기는 <옥희의 영화>를 묘사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재밌어. 그러니까 이선균과 문성근, 홍상수 감독의 영역이 부분적으로 겹치고 그 교집합을 정유미가 통과한다고 말할 수도 있고, 1편과 4편을 각각 2편과 3편의 현실로부터 파생된 영화 속 영화라고 볼 수도 있는데….” 중언부언하는 내게 친구가 말한다. “그래? 너 말대로라면 전혀 재미있게 들리지 않는걸.” 좌절스럽다. 부정확하더라도 역시 기사에 그림 설명을 넣는 게 좋을까.

9월2일

<옥희의 영화> 인터뷰 기사에 넣을 벤다이어그램을 주섬주섬 그려 들고 편집팀에 의논하러 갔다. 혹시 그림이 너무 유치해 보이려나, 그냥 빼는 쪽이 나을까 운을 뗐더니 편집기자가 매우 힘주어 동의한다. “그래요, 선배!” 안 물어봤으면 큰일날 뻔했다. (몇 시간 뒤 정한석 기자가 <옥희의 영화> 기사에 그림을 첨부했는데 무려 프랙탈 그림이다.) 편집기자는 대체로 옳다. 특히 마감 전야에 번득인 아이디어라면 이성의 마지막 수호자인 그들에게 반드시 검증받아야 한다.

늦은 저녁 약속. S선배가 불현듯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라스트 에어벤더>가 세간에서 말하는 만큼 나쁘지는 않더라고 했다. 비교적 망설임없이 실패작으로 판단했던 영화였기에 귀가 커다래졌다. 영화의 약점이 내 눈에 지나치게 크고 뚜렷해 보일 경우, 수사(修辭)가 수사를 부르는 잡지 글쓰기 속성상 판단이 둔탁해지기도 한다. 그 위험을 피하는 한 방법은, 내가 좋건 싫건 감독이 최초에 품었을 최선의 의도에 입각해 영화를 다시 생각해보는 것인데 <라스트 에어벤더>는 그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동석한 다른 사람들은 샤말란의 최고작으로 <언브레이커블> <빌리지> <싸인>을 꼽았다. <식스 센스>는 한표도 얻지 못했다.

9월3일

단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에 참여 중이다. 사변적 단편영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장르적 재기를 뽐내는 흐름이 승하더니, 이제는 감독이 잘 아는 작은 소재, 친한 공간을 파고드는 영화들이 대세다. 공미연 감독의 다큐멘터리 <술자리 에피소드7: 시>를 보다가 철렁 한다. 직장인인 남자는 대학원생, 취업준비생인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최근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털어놓으며 덧붙인다. “일기를 쓰고 있자면 군대에서 편지 쓰던 일이 생각나. 왜, 편지 쓸 때가 군대에서 제일 자율적인 시간이었잖아?” 아무도 강제하지 않아도 어느새 일상이 병영처럼 느껴진다는 의미일까. 그렇다면 뜻대로 방만히 살고 있는 사람에게 일기는 거꾸로 생활에 약간의 ‘군율’을 불어넣으려는 시도가 될까.

대체로 젊고 자연 가난한 감독들이 만든 서른한개의 단편에는 특정한 몇몇 공간이 거듭 등장한다. 빈도로는 옥상이 단연 으뜸. 옥탑방과 붙박이가구가 딸린 원룸이 그 다음이다. 짐짓 냉담한 표정과 분방한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젊은이들이 밤이면 돌아가 눕는 2010년의 옹색하고 사랑스런 방과 마당들. 이 프레임들을 한데 모은 사진첩을 상상해본다.

9월7일

희귀하게도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하 <김복남>)은 광고 문구가 영화의 핵심을 대뜸 지목하고 있다. “넌 너무 불친절해.” <친절한 금자씨>를 소환하는 연상 작용을 무릅쓴 이 카피는 영화를 보면 납득이 간다. 이상하게 들리지만 <김복남>은 여성학대나 복수보다도 ‘불친절’에 관한 영화다. 내가 보기에 이 영화가 베어버리고 싶은 주적은 괴물에 가까운 직접 가해자들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무난한 추임새를 넣으며 구경한 자들, 용인한 사람들, 작은 노력으로 막을 수 있는 고통과 비탄을 못 본 체한 자들, 요컨대 충분히 친절하지 않은 인간들이다. 그래서 복남의 친구인 서울 여자 해원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몫은 잉여가 아니라 결정적이다. 은행원 해원은 그녀의 대출상품 안내를 잘못 이해하고 셋집을 얻은 가난한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다. 그녀는 남을 해치지 않았으나 아마도 귀찮아서 오판의 가능성을 방치했다. 악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선하게 행동하려 들지도 않았다. 해원을 응징하는 사람은 제3자인 은행 미화원이다. 복남을 학대하는 시고모와 남편과 시동생은 그 극악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수수방관한 ‘그들’에 대한 형의 집행을 끌어내기 위한 장치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