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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텍스트로 돌아오라
2001-03-08

심영섭의 <눈물> 비평에 대한 이상용의 반론에 부쳐

오늘 <씨네21> 288호에 실렸던 <눈물>에 대한 응답이 도착했다. 의 영화 평론가 이상용에게서. 그의 반론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될 수가 있겠다. 첫째 <눈물>에 대한 사회적 함의에 대한 평가, 둘째 영화 평론가 심영섭의 <눈물>의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 그리고 이와 맞물려진 필연적인 귀결이지만 셋째 이상용 자신을 포함한 김영하의 십대 오리엘탈리즘 등과 연관된 <눈물>의 비판에 대한 옹호와 입장 표명 등으로 대별되는 것 같다.

먼저 <눈물>의 사회적 함의에 대한 평가 부분에서 이상용이든 나든 심지어 <눈물>이 십대 오리엔탈리즘을 조장한다는 김영하이든 <눈물>이 대한민국 주류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메스를 가하고 십대들의 감추어진 이면을 다루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는 데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러니 이 점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자(왜냐면 이상용 본인도 ‘<눈물>과 연관되어 이 사회는 다양성을 용납하지 않는 좆같은 사회’라고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으니까).

둘째, 심영섭의 <눈물>의 비평에 대한 메타 비평부분에 대해서 그는 심영섭이 이상용을 위시한 김영진과 이효인의 리뷰를 부정적인 것 일색으로 도식화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리뷰는 부정 일색도 아니며 세명 각자가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이효인은 <눈물>에 대해 잘 만든 주류영화라고 평가하면서도 <눈물>에 눈물이 나지 않거나 연민 혹은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고, 또 새리와 한이 여러 차례 시도하는 페팅과 섹스 장면은 고정 풀 숏 혹은 출렁이는 물을 걸치고 찍을 정도로 의도적이며 의심스러울 정도로 긴 노출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김영진의 경우는 <눈물>이 보여주는 절망과 에너지에 탄복하면서도 계몽주의와 냉소주의의 경계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것 같은 임상수의 연출은 석연치 않아 한다. 폭력과 성의 전시장이 되기 쉬운 아이들의 삶을 착취하기 쉬운 카메라의 시선 관음증을 완전히 거둬내지 못했다는 평가이다. 이상용의 경우는 리뷰의 메인 카피가 스스로 문제작인 척하는 미완성작이라고 달아 놓았으니 더 말하지 않겠다. 이 점에 대해 심영섭이 문제 삼은 것은 <눈물>이 정말 상투적인 줄거리에 기댄 아이들의 일탈에 대한 관음증이라는 저의가 있다고 보는가 하는 점이었다. 즉 <눈물>의 ‘진정성’ 문제 말이다. 김영진이 지적한 관음증, 이효인의 의심스러울 정도로 긴 노출 그리고 이상용의 문제작인 척하는 ‘태도’에 대해서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물>은 문제작이며, 관음증에 기대지 않았으며 의심스럽게 긴 노출은 길게 갔어야만 하는 좋은 연출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씨네21>에 두 페이지가 되게 구구절절이 써놓았다.

셋째, 이상용 본인과 김영하의 십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이상용의 평가와 입장 표명에 대해서는 난센스라고 생각한다. 일단 십대 오리엔탈리즘을 인용하면서 그 의도와 맥락은 거세한 채 필자의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았다는 이상용의 지적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소한 인용도 필자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바, 나의 경솔함과 무신경함에 대해 대해 김영하씨에게 이 지면을 빌려 정식으로 사과한다. 그러나 김영하의 ‘십대 오리엔탈리즘’보다 <눈물>을 둘러싼 여러 맥락들을 더 풍요롭게 언급한 글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 이상용의 의견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나는 분명히 영화 <눈물> 속에서 임상수가 아이들을 잘 알고 있고, 아이들의 상처를 이해하고(이해하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우리 사회의 대안문화의 가능성이 있는 십대 청소년들의 삶에서 애정과 가능성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자신의 리뷰가 <눈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이상용의 태도에는 화마저 난다. 감독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비판을 했다는 이상용의 <눈물>의 메타 비평에서 빠진 것은 바로 <눈물>이라는 텍스트 그 자체이다. 그의 메타 비평은 주변부를 겉돌고 있다. 예를 들면 똑 같은 텍스트, 즉 새리와 한이 여러 차례 시도하는 페팅과 섹스 장면에 대해 이효인은 고정 풀 숏 혹은 출렁이는 물을 걸치고 찍을 정도로 의도적이며 의심스러울 정도로 긴 노출이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심영섭은 의사소통을 하는 듯한 섹스다, 감독의 진심이 느껴진다고 평가하고 있는가 말이다. 왜 이같은 차이가 나는 것일가? 메타 비평을 하려거든 세부의 텍스트를 잡아 조목조목 하기 바란다. 그게 비판을 하더라도 평론가가 감독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심영섭이 <눈물>의 비평에서 언급한 몸과, 구토, 핸드헬드 기법, 뒷걸음치는 카메라, 가리봉동이라는 공간의 의미, 로 앵글 숏, 씻김굿 같은 섹스 등등의 <눈물>에 대한 텍스트는 다 어디다 날리고 그녀에 관한 메타 비평을 하겠다고 나선 것일까?

태어나길 이 지경으로 태어나서, 어쩌면 앞으로도 나는 또 누군가와 여기저기에서 치고받고 논전을 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진심으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가 무엇을 누구에 대해서 말하든 텍스트 그 자체를 가지고 진검승부를 하자는 것이다. <눈물>을 다시 한번 보라. 텍스트라는 글러브를 껴라. 그리고 정말 진하게 기진맥진할때까지 우리 한번 이야기해보자.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