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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계를 원하니?
2001-03-08

게임세계를 빌려 던지는 윤리론적 질문 <아바론>

아바론은 영원의 땅이다. 원탁의 기사를 이끌고 많은 피를 흘린 아서왕은 마지막 순간이 오자 그의 적이며 누이이고 연인인 모르가나의 품에 안겨 아바론으로 떠난다. 거기엔 영원한 삶이 있다. 불멸의 삶, 그리고 무한 회귀의 삶이다. 아바론에는 끝이 없다. 아홉 여신의 손길에 따라 모든 게 무한히 반복되고 재생된다. 신화는 게임 ‘아바론’을 통해 현실로 진입한다. 사람들은 끝없이 리셋되는 게임 속에서 영원한 재생이라는 무거운 짐에 허우적댄다.

보는 것은 믿는 것이다

서로를 응시하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입을 맞춘다. 계속된 NG에 지친 배우들이 중간에 화장실에 갔다가 손도 씻지 않고 돌아오지 말았을 거란 법은 없지만, 스크린을 보고 있는 사람들과는 관계없다. 스크린 속 키스신은 이미 현실의 운동이다. 영화를 보며 이미지들이 연속적으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받아들이는 관객은 없다.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의 여백은 맹목적인, 혹은 자기보호적인 신뢰에 의해 메워진다.

백문이 불여일견, 보이는 것에 대한 믿음은 동서고금을 꿰뚫는다. 보이는 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객관적이다.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하다. 모두 함께 나눌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이다. 반면 보이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낯설고 배타적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는 없다.

에콜로지스트인 그레고리 베이츠슨은 정신분열증을 상호 해석이 불가능한 상태,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정의한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정신분열증환자는 친절한 간호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커피를 한 잔 가져다준다는 건지, 길을 가르쳐준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같이 침대로 가자는 건지, 그에겐 해석할 능력이 없다.

정상인이 정신분열증환자의 머릿속에서 볼 수 있는 건 텅 빈 백지뿐이다. 하지만 그 속엔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정상인에게는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고, 그만이 경험할 수 있는 삶이 있다. 그 세계에서 그가 나누는 이야기는 간호사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반대로 정신분열증환자는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다. 바벨탑은 무너졌다. 그들은 서로 소통할 수 없다.

보이기 때문에 믿는 게 아니라 믿기 때문에 보인다. 사람들은 보아야 할 것만을 본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모두 공유하는 ‘보아야 할 것’을 통해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고, 집단적 공모 속에서 사회는 삶을 이어간다. 신화 ‘아바론’은 게임 ‘아바론’을 통해 현실의 ‘아바론’이 된다. 하지만 현실이 믿음을 가져오는 게 아니다. 믿음이 현실을 가져온다. 현실은 믿음을 통해 현실화된 신화다.

존재론이냐, 윤리론이냐

공모를 통해 믿음이 생겼고 거기서 평안을 얻었다. 세계는 평화롭고, 그 속에서 조화로운 의사소통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믿음과 평안은 불신의 씨앗이기도 하다. 이 평화로운 세계는 정말 ‘현실’적인 것일까? 철학이 시작되고, 나는 누구냐는 질문이 제기된다. 내가 존재하는 이곳은 어디이며, 나라는 존재는 실재하는 것인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질문은 현실을 불안하게 한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고양이가 그 대가로 생명을 빼앗기는 종류의 질문은 아니다. 백신은 바이러스다. 면역이 없으면 미미한 공격에도 죽음을 맞지만, 조금씩 바이러스가 투여되었다면 쓰러지지 않는다. 존재론적 질문은 오히려 현실을 강고하게 한다. 왜냐하면 다른 치명적인 질문이 잊혀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존재론적 질문은 별로 위험하지 않다. 정말 위험한 건, 세상을 뿌리부터 흔들어놓을 수 있는 건, 윤리론적 질문이다. 하지만 윤리론적 질문은 존재론적 질문에 치여서 감히 등장하지 못한다.

머피는 게임 ‘아바론’의 플레이어다. 그는 ‘아바론’ 사상 최강의 팀인 ‘위저드’의 리더였다. 머피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위저드를 공중분해하고 스스로를 ‘로스트’시키기까지 하면서 정체성이라는 진부한 고민에 매달린다. <블레이드 런너> <공각 기동대>에 이르기까지 영화에서만도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수도 없이 등장했다. 어느 세계건 이 질문은 금기되어 있다. 그리고 누구든 금기를 깬 사람은 비장한 주제가와 함께 맨앞에 뛰어나가 ‘로스트’된다. 하지만 수천년 동안 같은 질문을 던졌던 수많은 영웅들의 반열에 당당히 낄 수 있고, ‘아바론’에서 불사의 잠을 잘 자격을 얻는다.

하지만 영화 <아바론>은 신화 ‘아바론’을 넘어선다. 장렬하게 산화하는 영웅의 장엄한 모습에 가려져 있던 질문이 무표정하게 제기된다.

애슈 역시 ‘위저드’의 일원이다. 그녀는 위저드의 해체와 머피의 로스트에 대해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다. 아파트에서 하루종일 혼자서 그녀를 기다리는 귀여운 개 앞에서 존재론적 질문은 의미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애슈의 개가 사라진다.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많은 돈을 벌었기에 사올 수 있었던 진짜 고기와 야채로 스튜를 만들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그릇에 헉헉대며 코를 파묻을 개가 없다. 그 순간 봉인된 질문이 깨어난다. “나는 왜 이곳에 있을까? 내가 있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아바론>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는 끝없이 반복되었던 존재론적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를 선택하겠냐’는 윤리론적 질문이다.

존재론, 윤리론에 패하다

애슈는 머피를 찾아 ‘게임 리얼’로 들어간다. 거기서 두개의 질문은 대립하고, 애슈는 머피를 쏜다. 애슈의 손에 쥐어진 총의 이름은 ‘게임’이다. 애슈가 존재하는 세계는 ‘아바론’을 플레이하기 위한 세계다. 게임을 해서 돈을 벌고 또다음 게임을 준비한다. 미션을 완수해서 번돈으로 장만한 음식을 함께 먹어줄 개만 있다면, 이 세계에 존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애슈는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머피는 그렇지 않다. 그는 돌아갈 이유가 없다. 어둡고 침침한 ‘아바론’은 게임일 뿐이다. 지하철이 있고 도서관이 있고 사람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 이곳이 현실이다. 턱시도를 말끔하게 차려입고 음악회에 온 그는 총알없는 총으로 그녀를 겨냥한다.

영화는 스펙터클이다.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들이 공간적으로 배열되고, 그 이미지들이 재생되는 순간 공간적 운동은 시간적 운동으로 된다. 조각난 이미지, 수많은 현실 운동으로부터 분리해낸 이미지들이 모여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운동이 생산된다. 그것이 영화적 스펙터클이다.

애슈의 세계인 게임 ‘아바론’은 진화된 스펙터클의 세계다. 이미지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스토리가 구성되는 건 마찬가지지만 소비자는 좀더 적극적이다. 내가 졸든 뛰쳐나가든간에 상관없이 냉담하게 운동이 진행되는게 아니다. 게이머가 키보드 혹은 게임패드에서 손을 떼는 순간 게임 이미지의 운동은 정지한다. 그리고 다시 손을 대면, 언제 멈췄냐는 듯이 이미지의 운동은 다시 활기차게 생산된다.

게임에는 교묘한 속임수가 있다. 어떤 이미지에서 다음 이미지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소비자가 직접 키를 눌러야 한다. 물론 게임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이고, 키를 누르는 순간 생산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게이머의 능동적인 의지가 없이는 게임 이미지의 운동이 만들어질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게임을 진화된 스펙터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이 교묘한 착각 때문이다. 스펙터클이 현실에 대해 느꼈던 부족함, 이미지의 배열과 재생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에 느껴지던 주체의 거리감은 진화된 형태의 스펙터클에서 사라져버린다.

게이머는 관객과 다르다. 운동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그 속에 직접 들어간다. 비록 착각일지라도, 자신은 운동의 지배자다. 이제 ‘이 게 꿈이야 생시야’가 아니라, ‘이게 과연 제일 좋은 꿈일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애슈는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애슈는 게이머다. 여기야말로 ‘현실’이라는 머피의 말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건 은발의 메슈, 색깔있는 옷을 입은 애슈가 아니라 개와 함께 있는 애슈일 뿐이다. <아바론>은 귀여운 강아지고 욕망이고 현실이다. 존재론적 질문은 윤리론적 질문에 패하고 사라진다.

<아바론>, 그리고 진화는 시작된다

LSD의 힘을 빌려 영혼 깊은 곳을 여행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트리퍼(tripper)들은 여행을 통해 ‘강요된 것’이 아닌 것을 보려고 했다. 그들은 ‘일상’에 감춰진 숨은 광기를 경험했다.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경험하고 이야기했다. 거기엔 머리에서 꽃이 피어나는 사람, 다이아몬드를 든 채 하늘에 떠 있는 루시가 있고, 길게 늘어진 몸으로 육화한 시간이라는 뱀이 똬리를 틀고 있다. 내가 있는 곳은 어디냐는 질문은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교묘하게 전재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경험을 통해 존재론적 질문이 가진 음모를 밝히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음모를 넘어설 때 사람들의 정신은 진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LSD가 아닌 게임을 통해 그들의 여행이 완성되었다. 게임에서는 무엇이 진실이고 현실이냐는 질문이 무의미하다. 중요한 건, 어느 쪽이 내가 살고 싶은 세계인가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은 바로 나, 즉 그 삶의 지배자인 개인에게 속한다. 상냥한 간호사가 말을 건다. “무얼 도와드릴까요?” 도대체 무슨 말이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사람들 사이’의 삶이 아니라 ‘사람’의 삶이 시작되고, 바벨탑의 저주는 완성된다. 자유와 개인의 정신적 진화가 시작된다. <아바론>은 그 진화의 출발점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