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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라, 영영 잃기 전에
2001-03-08

아동보호 외치는 독일과 영국의 공익광고들

(좌)2000, 영국 Barnardo’s 캠페인

제작사 Bartle Bogle Hegarty, London

아트디렉터 Adrian Rossi 카피라이터 Alex Grieve

(우)1999년, 독일 아동보호캠페인

제작사 Boebel/Adam, Frankfurt am Main

아트디렉터 Marco Fusz 카피라이터 Jens Daum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기 무섭게 저마다 황황히 어디론가 떠난다. 책가방을 팽개쳐놓고 그들이 발길을 돌리는 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과외학원, 미술학원, 태권도학원, 피아노학원, 글짓기학원…. 부모들이 정해준 안전한 은신처에서 얌전하게 시키는 일만 하는 아이들도 물론 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숨을 곳은 많다. 호프집, 카페, 당구장, 만화방, PC방…. 어른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아이들을 숨겨주는 은밀한 아지트는 무궁무진하다.

세상엔 어른들이 모르는 블랙홀이 왜 그리 많은지? 골목골목에 무슨 덫이라도 놓아둔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배회하는 아이들을 집어삼킨다. 끽연, 패싸움, 가출, 매춘, 약물은 이제 한물간 메뉴다. 자살사이트라는 신종 함정이 군데군데 클레모어처럼 파묻혀 있다. 알지 못할 광기에 휩싸여 파리처럼 목숨을 던지는 유행병이 초고속 인터넷망을 타고 번지고 있다. 사람의 몸뚱아리를 값으로 따져서 506원짜리로 환산해 버리는 해괴한 셈법도 힘을 받고 있다. 주술처럼 그 셈법은 아이들을 세뇌시켜 서푼어치(?) 유기체를 너무나 간단하게 유기해 버리는 마력을 발휘한다.

불나방처럼 꼬여드는 자살에의 충동은 힙합의 율동으로 호소하는 컴백홈 메시지로도 어찌할 수 없다. 교실로 돌아오라는 신성한 이데아도 빛을 바랜 지 오래다. 아동학대 예방센터(www.child.seoul.kr)라는 기관이 만든 포스터도 구태의연하기 그지없다. 탤런트인지 개그맨인지 정체가 불분명해진 윤다훈과 김지선 꼬마가 나오는 홍보물의 비주얼은 그들이 함께 출연한 영화 <고해>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다정한 포즈. 거기에 카피가 맹맹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아이들은 소중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아동학대 긴급신고를 권하는 전화번호를 큼지막하게 박아놓고 있다. 무슨 감동이 있을까? 무슨 충격을 유발할까?

백화점에서 길을 잃었었다. 독일의 어느 도심에서였다. 그러나 거기서 만난 홍보물 하나는 광고판에서 길을 잃은 나에게는 하나의 빛이었다. 충격이었다. 광고도 아니고 포스터도 아니고 판매현장의 판촉물도 아닌 것이 뭐라 규정하기 힘든 홍보물. 매체는 다름 아닌 에스컬레이터였다. 소피가 급해서 다급하게 화장실을 찾아 뛰어가던 내 발길은 그 에스컬레이터 계단 위에 얼어붙고 말았다. 에스컬레이터 한칸한칸에 아이들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는 것이 아닌가? 끔찍한 기분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계단에 엎드려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컨베이어 벨트에 씹혀 빨려들어가 버리는 형국이라니. 전율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매체형식의 전위적인 실험성은 처음 그 광경을 맞닥뜨린 사람에게는 굉장한 잔상효과를 남겼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들의 얼굴은 사라져도 그 표정이 말해주는 무언의 메시지는 쇼핑바구니에 오래오래 담겨 있었으리라. 얼굴 사이사이로 적혀 있는 카피는 이런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덧없이 사라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좀더 일찍 아이들과 함께 하세요. 너무 늦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말입니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그림1).

지금 이 시간에도 그 홍보물은 나를 돌이켜 보게 한다. 나는 아이들과 몇 시간이나 같이하는지? 집에 있는 시간에도 단 몇분이나 온전히 그 아이들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지? 벌써 늦었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인 사내아이는 온종일 PC 안에서 놀아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이다. 아빠의 개그는 세상에서 가장 유치하고 썰렁한 각설이 타령이 되어가고 있다.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또다른 광고물 하나. 버나도스(Barnardo’s)라는 자선단체가 만든 포스터도 꽤 자극적이다. 어둠침침,지저분한 방 안에서 입에는 호스를 물고 주사기를 움켜잡고 있는 꼬마. 기저귀를 찬 모습과 이 기괴한 광경이 언뜻 잘 매치가 되지 않는다. 헤드라인이 꽤나 생뚱맞다. “존 도널드슨, 23살”(그림2).

눈길을 본문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잦은 구타는 늘 마약의 유혹을 불러일으켰지요. 우리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아이의 미래는 빈 깡통이었을지 모릅니다.” 실제연령은 23살이지만 사랑의 손길이 없었다면 이 청년은 유년기에서 성장을 멈추었을 수도 있다는 비주얼 경고가 준엄하다. 결손아동과 가족, 학교, 지역사회를 위한 기금모금을 호소하는 메시지다. 마약, 자살충동, 주벽, 매춘으로 이어진 아이들의 20∼30년. 그 참혹한 인간파괴의 재앙은 어린 시절부터의 무관심과 방치에서 오는 것임을 각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늦지 않았을지 몰라. 사라진 아이들을 지금이라도 찾으러 나선다면….

이현우/ 제일기획 제작국장·광고칼럼니스트 2nu@chei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