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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의 연애와 행복했던 말년, 그리고 영화에 대한 신념 - 윤봉춘(6)
2001-12-28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영화 이전에 사상이 바르게 서야 한다”

해방 전에도 그랬지만 해방 후에는 외화가 많이 들어왔습니다. 국산영화는 돼도, 극장에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 모여서 외화를 제한해야 되겠다. 일년에 50개라는 게 그때 나온 숫잡니다. 지금 이렇게 국산영화 붐이 일게 된 것은 그때부터 그렇게 됐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짝에 협회를 조직하고 그러니까 영화인들은 단체적으로 체계가 서 있고, 또 전체적으로는 외화 제한했기 때문에 국산영화 양과 질이 좋아졌고. 그후에 영화법(1962년에 제정하여 1963년부터 발효- 필자)이 되지 않았습니까. 초대 영화법은 그것도 순수 예술인들과 합석을 해서 하면 좋은데, 몇몇 기업자하고 당국자, 혁명하는 군인들이 뭐 잘 알겠어요. 다 그들이 말하면 오케이. 그래서 영화법이 됐거든요. 그 폐기 운동을 삼년을 하다가 결국 좌절이 됐죠.

고문 경찰의 딸과 첫사랑에 빠져

제가 지금까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첫사랑은 <옥녀> 백일 때(‘찍을 때’라는 뜻. <옥녀>는 1928년 작- 필자), 조선키네마에서 나한테 여름 동안 휴가를 줬습니다. 그래 고향인 회령으로 갔다가, 정거장에서 참! 평생 처음으로 미인을 만났어요. 서울 올라올 날짜 연기해가면서 연애가 됐습니다. 사귀어놓고 보니까 나보다 월등히 상식도 많고, 하는 행동이 예민하고 익숙해요. 그래서 이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어머니한테 먼 빛으로 뵈었죠.

그런데 우리 어머니 말이, “너 그게 누군지 아느냐? 저 사람이 니가 학생 때 붙들려 갔을 때마다 고문하던 그 헌병 보조원 허진중의 셋째 첩이다”. 그때 내가 계집한테 빠진 모양이에요. “결혼을 하겠습니다.” 서울 와서 낙원동 하숙방에서 살았습니다. 나는 창신동 프로덕션 왔다갔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하숙에 와 자고. 몇달 만에 이 여자는 생활에 권태를 느꼈습니다. 허영심이 심했죠. 그러더니 생명보험회사 외교원으로 취직이 됐다면서 전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끊겼죠.

<두만강을 찾아서>(1928) 촬영하느라고 출발할 때 다시 날 찾아왔습니다만, 내가 냉정하게 뿌리쳤죠. 몇년 뒤 회령에 갔을 때, 그 헌병 보조원이 날 찾아왔습니다. 가슴이 철렁 했죠. ‘아직도 나를 고문할 게 있나? 무슨 사건 하나 터졌나?’ 근데 이 사람은 헌병 보조원이고, 이 사람 아버지는 간도에서 광복군 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당신 아버지를 만나면 어쩔 꺼냐” 그러면 “잡는다”고 그럽니다. 친구들이 “너 그러다가 조선 독립이 되면 어떡하니?”, “독립이 돼? 독립이 되두 나를 쓸 거다. 왜? 나는 기술자니까. 독립군 잡는 데 우린 귀신이다. 잘 잡는다”. 남한 대한독립 돼가지구 과거 일정 경비들 많이 썼습니다. 그러니 참, 선견지명이 있다,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는 하소영이라고, 대구에서 극장에 그림 그리는 사람 소개로 만났지요. 이 여잔 또 어떤 여잔고 하니, 원래 기녀 출신입니다. 이 여자가 기운이 왕성했어요. 성북동 살 때 장마가 지면 날 업어서 개울을 건너가고. 또 기운만 센 게 아니라 섹스가 너무 강해요. 이건 뭐 도무지 뭐. (웃음) 나하고 같이 살면서 영화에 몇편 출연했습니다. <개화당이문>(1932, 감독 나운규) 하고, <큰 무덤>(1931, 감독 윤봉춘) 하고.

그러다가 청진에 와서 여관을 차리려고 했는데 내가 불온분자라고 허가가 안 났어요. 그러니까 이 여자가 주점을 차렸죠. ‘서울 영화배우 하소영양의 술집’ 써붙입니다. 초저녁부터 만원입니다. 갖은 음탕한 소리가 다 들립니다. 난 구석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습니다. 내가 뭐냐? 사흘 만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교회를 지은 사람이고, 나는 예술인이다. 니가 내 존재를 망쳐먹었다. 살 수가 없다. 너하고 나하고 헤어지자”. 회령에 돌아와서 나도 타락이 되더군요. 영화를 버렸죠. 소문은 나쁘게 났죠.

신문에 난 영화기사 보고 눈물이 콸콸

그후로 김낙순이라는 차력사와 용정으로 흥행을 다니면서 떡을 팔았습니다. 거의 1년 가까이 눈 속을, 만주를 돌아다녔습니다. 간도 훈촌에서 공연 끝나고 여관방에 갔는데 신문이 왔어요. 보니까 그해 1년 동안 서울에서 만들어진 영화 총평이었습니다. 이걸 보는데, 눈물이 콱 쏟아져. 친구들은 이렇게 서울서 영화를 부지런히 하는데, 넌 뭐인데 만주로 댕기면서 이런 생활을 하느냐? 이건 안 되겠다. 마침 백암 기차 정거장에서 삼류극단을 만났는데, 단장이 연극하는 거 보고, 잘못된 거 고쳐주고, 새 각본도 하나 해달래서 거기 따라 다시 서울로 왔죠.

그래가지고 다시 영화계에 종사하는데, 지금 이 사람(부인 문순남 지칭- 필자)을 만났습니다. 홍노작(홍사용)씨가 그때 불교전문학교 학생들과 연극을 했습니다. 자기가 연출 보는데 나더러 와서 좀 봐달라는 겁니다. 하룻저녁 연습하는 델 갔더니, 지금 우리 아내 되는 사람이 이 학교 교원으로, 여배우로서 리허설을 하고 있어요. 거기서 처음 만났는데, 투실투실하고 인물은 그렇게 없지만은 사람 좋아 보이고 만날 때마다 호감이 가서 적극적인 연애에 돌입을 했어요.

이 사람이 자기 아버지한테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거 참, 혼삿감 다 마다하더니 어떤 녀석이 그렇게 좋다고 하는지 한번 만나자”고. 그래 이제 인사를 나눈 다음에 “가끔 애들 데리고 극장구경도 하지마는, 그 영화배우라고 하는 것은 아직 우리나라에선 이해도 되지 않는데, 왜 영화배우가 됐나?” 그래서 “영화배우라는 것은 대학교수와 마찬가집니다. 계몽하는 데 필요합니다. 영화라는 것은 권선징악입니다. 그래서 제 여동생 둘도 지금 하나는 영화계, 하나는 연극계,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할 작정입니다” 했지. 거 영감으로서는 새로 듣는 얘기거든. 장모를 부르더니 “장국 어떻게 됐나?”. 그땐 장국 먹으면 일이 되는 거거든. 장모가 장국 가지고 들어오면서 “거참 이상하다. 신랑감 잘생기지도 못했는데, 숱한 사람이 들어와도 다 마다하더니 어째서 자네가 되었나?” 그러더라구.

다음번 볼 땐 결혼식을 하자 그래서 “지금 제가 돈이 없습니다. 예술인들은 다 빈약합니다. 돈 좀 벌어가지고 하겠습니다. 그저 몇달만 참으시면 됩니다” 했는데, 이게 사고의 원인입니다. 즉각 약혼이 취소되었습니다. 하루는 이 사람이 헐레벌떡 대문을 차고 뛰어들어와요. “제발 나 좀 숨겨주세요.” 다른 데 시집가라고 해서 탈출을 했다는 겁니다. 장인이 나를 만나면 사생결단낸다고 대문간에 뻗대고 섰죠. 아무리 해도 안 돌아가요. 문순남이도 집에 가지 않고, 여관방에서 나하고 동거생활했습니다.

신부가 도망갔는데, 어떻게 됐겠어요? 집에선 난리가 났죠. 그래서 셋째 동생이 대신 시집을 갔습니다. 자기 언니하고 바꿔쳤어요. 그러니까 자기 언니 이름으로 시집가는 겁니다. 청첩장 다 돌려놨으니까 쉬쉬해버리고. 결혼하는 고날, 고 시간에 조선일보 건너편 나즈막한 중국요릿집 이층에서 우리는 배갈 한잔 딱 먹고 우리끼리 결혼식을 건넸습니다. 우리 이것으로써 완전한 부부 되는 약속을 하자! 이래가지고 그 사람과 지금도 같이하고 있습니다.

나 환갑 때, 결혼식과 은혼식, 환갑식을 같이 했는데, 목사가 주례 되어가지고 마이크 앞에서 사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놀라고. 서로 가락지를 교환하고, 육남매가 쭉 와서 한꺼번에 절을 하고 내려갔습니다. 그때 여배우들 가운데 복혜숙이는 술이 만취해서 눈물 겸 웃음 겸 춤추고 돌아간 일이 있었고.

지금은 행복스럽게 살죠. 맏아들이 윤삼육. 고 담에 윤태옥. 차녀 윤태심. 삼녀 윤태봉. 고게 윤소정(연극배우- 필자)입니다. 탈렌트로 영화에도 좀 나오고 그랬죠? 고 다음에 사녀 윤태희. 차남 윤태병. 좋지 않습니까?

“나는 죽어서도 영화인”

늘 하는 얘기지만, 연기자나 예술인이 되기 전에 먼저 완전한 사상적인 기초가 있고 인생관이 뚜렷해야 자기 몸을 잘 조정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자기 국가가 있고, 정치적·경제적으로 안정이 돼서 그런지 몰라도, 예술인들은 사상이 철두철미한 것 같지 않습니다. 세계적인 사조가, 앞으로 삼차대전이 끝나면 통일된 하나의 정부가 생긴다, 민족이나 국가를 초월한 하나가 된다, 그래서 국가관념이라든가 이런 게 점점 희박해진다,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건 먼 장래의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고. 지금은 이렇게 개인주의로 흘러버리고, 향락주의로 흘러버린단 말입니다.

내가 특별히 훌륭한 예술가나 위대한 사상가는 아닙니다. 나는 지금도 수유리 골에서 아들놈 덕에 살지마는 과거 40년 동안 쪽 고난 속에서 살아왔고, 해방된 이후에도 돈을 등지면서 작품에 주력을 해왔습니다. 내가 사상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목숨이라는 건 살면 살아진단 말예요. 목숨을 위해서, 먹고살기 위해서 변절을 한다 하는 거는 인간이 아니다. 나는 영화인으로서 자부해왔고, 죽어서도 나를 영화인 아니라고 할 사람이 없을 것이고. 내가 그전에 변절했다면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을 것입니다. 재주가 있거나 천재적 작품이 있어서 나를 영화인이라고 그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예술인들도, 순수 예술인도 좋지만 목적의식이 있는 예술인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정리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shymoss@dreamwiz.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