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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안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불신의 유예와 몰입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시뻘건 벙거지를 뒤집어쓰고 손목에서 거미줄을 뿜어내는 사내가 있다거나, 박쥐 날개처럼 생긴 새까만 가죽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내가 있다거나, S를 새긴 파란색 쫄티를 입고 추락하는 여객기를 두손으로 받쳐 승객의 목숨을 구해주는 사내가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영화로 감상하려면 이 회의적 태도를 버리고 영화 속 현실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믿어줘야 한다. 이렇게 픽션을 수용하기 위해서 현실에서라면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전제를 수용하는 태도를 가리켜 ‘불신의 유예’(suspension of disbelief)라 부른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거기에는 물론 역사적 배경이 있다. 중세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럽인들은 환상적인 것의 존재를 믿었다. 하지만 계몽과 과학의 시대에 천사와 악마, 마녀와 요정 따위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18세기에 들어와 초자연적인 것은 유럽 대륙에서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가령 <햄릿>에서 선왕의 유령이 출몰하는 장면이 있다 하자. 셰익스피어의 동시대인들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 믿었겠지만 콜리지가 살던 18세기의 유럽인들에게 이미 유령은 그저 허구의 산물일 뿐이었다.

마음에서 신체까지

과거의 독자는 스토리 속에 초자연적인 것이 등장해도 그것을 ‘개연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계몽된 독자들은 그런 것이 스토리의 개연성을 해친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18세기 이후 문학에서 초자연적 현상, 환상적 존재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세계를 환상없이 바라보는 이 과학적 경향은 19세기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서 절정에 달한다. 하지만 고딕적 상상력에 탐닉했던 콜리지는 환상적인 것의 자리를 남겨두기를 원했다. 문제는 의심 많은 ‘계몽된’ 독자들에게 환상적 존재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 하는 것. 방법은 ‘믿는 것’을 ‘안 믿지 않는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콜리지는 이웃에 살던 윌리엄 워즈워스와 시에 두 가지 핵심적 요소가 있다는 합의에 도달한다. 하나는 (워즈워스의 시처럼) “자연의 진리를 충실히 견지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자극하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콜리지의 시처럼) “상상력의 색채를 변조함으로써 진기함의 흥미를 주는 힘”이라는 것이다. “초자연적 혹은 적어도 낭만적인 인물이나 성격”에 관심이 있었던 콜리지는 “이 상상의 그림자들”에 대한 묘사가 “시적 신뢰를 구성하는 불신의 자발적 유예를 부여하기에 충분할 만큼 (…) 진리의 외관”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진리의 외관’(semblance of truth)이라 함은 ‘아무리 가짜라도 진실처럼 보여야 한다’는 뜻이리라. 독자가 아무 때나 불신을 유예해주는 것은 아니다. 가령 불신의 유예를 통해 은하계에 우주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을 일단 전제한다면 이어지는 스토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가능세계의 논리에 따라야 한다. 즉 거기서 우주선을 타고 광속으로 이동하는 것은 허용되어도, 죽은 자의 원혼이 유령이 되어 나타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진리의 외관’, 즉 가능세계의 허구적 개연성마저 없다면 아무리 너그러운 독자라도 불신을 유예해주지 않을 것이다.

‘불신의 유예’는 주로 ‘판타지물’이나 ‘공상과학물’을 수용하는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하지만 현실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도 어느 정도 독자나 관객에게 불신의 유예를 요구한다. 가령 액션영화에서 주인공이 든 총에서는 종종 총탄이 떨어지지 않는다. 또 모든 자동차는 마치 그 안에 폭약을 싣고 있었던 듯 전복 혹은 충돌하자마자 폭발한다. 도를 지나치지 않는 한 관객은 어느 정도의 과장은 믿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심지어 감독이 수류탄으로 옥수수를 튀겨 스크린 위에 팝콘의 눈을 뿌려도, 관객은 그것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지 않던가.

미디어이론에서는 ‘불신의 유예’를 좀더 넓게, 말하자면 프레임 안의 사건을 현실로 수용해주는 태도를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 이 경우 ‘불신의 유예’는 판타지나 SF만이 아니라 모든 허구에 몰입하기 위한 심리적 전제가 될 것이다. 소설이나 영화에만 불신의 유예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도 모니터 속의 사건을 마치 지금 실제로 벌어지는 것처럼 믿어줘야 한다. 그 정점은 닌텐도 Wii가 아닐까? 가령 Wii의 플레이어들은 허구의 게임을 하기 위해 온몸을 사용한다. 여기서 불신의 유예는 ‘심리적’ 태도를 넘어 ‘신체적’ 행동이 된다.

‘불신의 유예’가 영화이론의 밖으로 나와 정치적 수사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힐러리 클린턴은 상원 청문회에서 이라크 파견 미군 사령관이 제출한 보고서를 비꼬는 데에 이 오래된 문예학의 개념을 동원했다. “당신의 보고서는 정말 불신의 유예를 요구하는군요.” 한마디로, ‘당신의 보고서는 허구적이다. 그것을 믿으려면 현실에서라면 결코 용납되지 않을 황당한 전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힐러리 클린턴이 한국의 국회의원이었다면 천안함 침몰에 관한 국방부의 엉터리 보고서를 읽으며 같은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안과 밖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 안되는 그 영화는 몰입이 잘 안되나 보다. 어느 신문에 이런 칼럼이 실렸다. “영화 관람을 무사히 마치려면 어린아이의 마음과 눈높이로 돌아가야겠다고 재빨리 다짐했다. (…)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예수의 말씀도 생각났다. 나는 슬쩍 그 말씀을 바꾸어 나 자신에게 암시를 걸었다.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이 영화를) 끝까지 보지 못하리라.’ 나는 여기저기서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면 때에 맞춰 함께 웃어주었다.” 불신을 유예하기 위해 예수의 권능까지 필요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불신의 유예’는 정작 영화 밖에 있다. <충무로라는 이름의 존재하지 않는 적지에서 아무도 하지 않은 멸시를 당하며, 거대자본 CJ에 투자와 배급을 당하는 경제적 수모, 지원금 12억원+보증금 30억원의 국가적 냉대, 돌리는 채널마다 얼굴이 나오는 사회적 무시를 극복하고, 미국에서 찍고 미국 배우가 미국말로 연기하는 영화로 한국을 알리고, 미국 관객의 최악의 평으로 국위를 선양하며, 한국에서 올린 수익의 대부분을 할리우드에 뿌림으로써 조국에 달러를 벌어다준다.> 이 황당한 각본에 온 사회가 넋을 잃고 불신을 유예한다. 까닭이 뭘까?

두 종류의 영화가 있다. 그가 극장 안에서 상영하는 영화, 그리고 그가 극장 밖에서 연출하는 영화. 감독으로서 그의 재능은 가상의 세트 안에서 2D영화를 찍을 때가 아니라 외려 현실의 거대한 세트에서 3D영화를 연기할 때에 빛난다. 극장 ‘안’에서 그의 관객은 억지로라도 웃기 위해 전두엽에 할례를 받고 동심으로 퇴행하는 고역을 치르나, 그가 극장 밖에서 연기하는 영화는 다르다. 그 앞에서 많은 대중이 흔쾌히 불신을 유예한다. 이처럼 완전한 몰입(영화 속으로의), 완벽한 동일시(주연과의)가 또 있을까?

안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할리우드가 그들의 것이리라. 아멘. 소망이 너무 강렬해서일까? 그의 영화가 개봉될 때마다 현실은 그의 인생을 담은 한편의 거대한 자전적(自傳的) 영화로 돌변한다. 그 황당함에도 불구하고 관객이 이 신파에 매료되는 것은 영웅의 대사가 너무 감동적이어서일까?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존재하지도 않는 적과 싸움을 하고, 메울 수 없는 적자를 메우며, 잡을 수 없는 미국의 배급사를 잡자….”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