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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이정의 예술판독기] 기계 미학의 전위, 전시공간의 후위

연예정보 매거진 <베니티 페어> 1월호는 세계적 디자이너이자 부호 랠프 로렌의 차고 내부 사진을 공개하며 ‘미술관 같은 차고’라는 표현을 골라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촬영된 전 차종들은 백색 좌대에 올려져 하이라이트 조명을 받은 채 자태를 과시하고 있어서 수장고보단 전시관처럼 보였다. 그가 평생 수집한 클래식 명차는 70여대가 넘는데, 이중에서 선별된 17대가 최초로 유럽 나들이에 나선다. 2005년 보스턴 미술관에서 열린 소장 명차 전시회에 이은 것으로, 프랑스 파리 장식 박물관에서 4월28일부터 여름의 끝물까지 넉달여 전시의 형태로 공개된다. 전시 타이틀을 ‘자동차의 예술’(The Art of the Automobile)로 잡았다. 랠프 로렌의 차량 컬렉션 화집 <속도 양식 미>(Speed Style & Beauty, 2004)에서 “언제나 차를 예술품으로 간주했다”고 고백한 그다.

1차대전 직후인 20세기 초, 기계의 우월성을 추앙하는 세계관이 지배한다. 근대적 건축가 르 코르뷔제는 가옥조차 ‘사람 사는 기계’로 규정할 만큼. 기계 우월주의에 젖은 부유층이 고급 스포츠카를 사모으기 시작한 때도 이 무렵이다. 장인의 주관적인 손맛을 털어내고 차갑고 객관적인 기계 논리에 찬사가 집중되었다. 기계 미학의 여명이 밝아왔다.

기계 미학은 감동의 깊이가 기계와 소장/사용자의 삶이 연동할 때 더한다는 사실에 방점을 찍는다. 기계를 매개로 전근대적 미관을 보정했으니 일종의 근대적 발견인 셈이다. 모든 기계가 그렇듯 차 역시 1차원적인 감상을 떠나 탑승자와 차량이 일심동체일 때 단일 감각의 차원을 넘어 온몸으로 수용되는 입체적 감동의 매개체가 된다. 차와 일체가 된 감상자는 차량 제조자의 세심한 설계의 배려까지 체감하며 차원이 다른 흥분을 맛볼 것이다. 전시장에 진열 중인 명품 차량들은 관람자의 시각 만족만 유도하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때문에 기계 미학 감동의 본질은 소장자에게 온전히 귀속되기 마련이다. 오감을 통해 ‘체험’되는 기계의 고유한 감동과 제3자가 지각하는 간접 감동의 단면성은 질감부터 다르다(랠프 로렌 차 컬렉션 공식 사이트에는 개별 차종마다 내는 상이한 시동소리를 음성파일로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기계로부터 파생된 또 다른 질감마저, 그것을 분별하고 감미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랠프 로렌 본인과 그에 버금가는 클래식 명차 수집가들로 한정될 거다).

희귀 차량 전시회가 봉착하는 또 다른 역설은 실용품인 자동차를 제도 전시 공간에 늘어놓고 응시의 대상으로 국한해 이동수단이라는 태생적 실용 가치가 억압되면서 희소한 골동가치만 비대하게 강조된다는 점이다. 랠프 로렌 차 전시회의 홍보물이 앞세운 대표 작품은 전세계에 단 4대만 생산된(현재 2대만 남은) 1938년형 부가티 57S 애틀랜틱 쿠페다. 이는 원본 없는 시뮬라크르의 시대에도 원본의 희소가치를 내세운 전근대의 미학이 여전히 잘 먹힌다는, 제도 예술의 보수주의를 관철시킨 영롱한 증거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