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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도전, 마음으론 4년 내내 준비했다

최우수상 당선자 이후경

전화를 걸어 ‘전세영씨’를 찾았더니 “우리 언니”라며 여동생이 받는다. 동생이 가르쳐준 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전세영씨가 아니라 ‘이후경(25)씨’가 받는다. 전세영은 지금은 퇴사한 선배 동료의 이름인데 그냥 예뻐서 썼단다. 젊은 필진의 등장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 이론과 예술사를 졸업했고, 지금은 출판쪽에 몸담고 있지만 영화 글쟁이로 오래도록 일해볼 각오는 되어 있다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해마다 한번씩 내봐야지 했는데 내자 마자 척하니 당선됐다. 젊은 필진이다. 기대된다.

-올해 떨어졌으면. =당연하게 생각했을 거다. (웃음) 그런 다음 내년에 또 해봐야지 생각했을 거다. 혼자서 공부하는 건 어렵다. 이런 계기는 공부를 하게 해주지 않나. 처음 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으론 4년 내내 준비했다.

-어떤 기준으로 쓸 영화를 골랐나. =작품비평은 가장 최근에 본 것 중 개인적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을 골랐다. 남들에게는 덜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보면서 울었다. 이론비평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의견을 이야기했다가 비판당한 적 있었던 소재를 골랐다. 그때는 너무 나이브하고 허술하다고 비판받았는데. (웃음) 그 뒤로 생각하고 고민한 다음 써봤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되면 좋겠다.

-어떤 영화가 좋나. =로메르!! 그의 영화는 편하고 좋다. 보면 행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떤 평론이 좋나. 어떻게 쓰고 싶나. =내게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아는 만큼 쓰고 싶다. 나를 아는 주변인들이 봤을 때 그 글이 딱 나처럼 보인다면 좋겠다.

이후경

데이빗 핀처가 테크놀로지를 사유하는 방식

데이빗 핀처의 최근 두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와 <소셜 네트워크>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외도처럼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비록 다음 영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를 통해 스릴러로 돌아온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가장 정통한 장르는 흔히 스릴러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이 최근 두 작품과 그 전에 만들어진 <조디악>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 느껴진다. 물론 이는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테크니션으로서 영화를 만들어 온 핀처의 스타일은 세 영화 모두에서 이어진다.

핀처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건 과잉된 스타일을 통해 테크놀로지를 동시대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착각의 용기를 엉뚱하게도 <셜록>이란 영국 드라마를 보다 얻었다. <셜록>은 BBC에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몇몇 대표작들을 묶어 현대물로 번안한 드라마다. 빅토리아시대에서 아이폰시대로 이사한 셜록 홈즈는 아이폰, 블로그, 니코틴 패치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것들은 홈즈의 허기와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는 현대의 발명물들이다. 그렇다면 탐정소설에 있어 최고의 고전이라 할 만한 셜록 홈즈가 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진입했을 때, 고전의 고유한 분위기는 무엇으로 대체될 것인가. 동시대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 위해 드라마는 어떤 스타일을 취해야 하는가. 이는 핀처의 최근작들에 대한 인상을 설명하려 할 때도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드라마가 다듬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셜록>의 중심 아이디어를 쉽게 알 수 있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BBC는 이 드라마의 정식버전을 내기 전 파일럿 버전을 만든 바 있다. 두 버전의 차이는 바로 속도감이다. 파일럿 버전은 다소 느슨한 리허설처럼 진행된다. 그런데 정식 버전에서는 모든 요소들에 가속이 붙으면서 훨씬 타이트한 구성을 이루어진다. 이 드라마의 극적 완성도는 속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성된 버전에서 배우들의 대사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편집과 촬영의 양면에서도 속도감이 월등히 향상된 걸 느낄 수 있다. 단순히 극의 전개가 빨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전체 구성은 파일럿 버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영상이 빠른 속도의 리듬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우의 대사를 포함한 여러 기술적인 측면을 다듬은 것이다. 특히 터치 모바일 유저들이 친숙하게 느낄만한 ‘아이폰스러운’ 줌인과 자막사용, 장면전환에서는 일상적으로 친숙하게 보아온 비주얼 테크놀로지의 운동감과 속도감이 느껴진다. 영상의 그 빠른 리듬감에 시청자들은 감각을 내맡길 것이다. 그리고 그 리듬감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재미의 핵심을 이룬다.

시간적 배경이 19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면서 <셜록>은 동시대를 담아내기 위해 테크놀로지의 여러 속성 중 속도를 선택했다. <셜록>을 본 뒤 뒤늦게 <소셜 네트워크>의 빠른 리듬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핀처 역시 동시대의 테크놀로지를 영화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속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또 <소셜 네트워크>에서 <벤자민>, <조디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외도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에 대한 각기 다른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셜록>이 탐정 문학을 과학수사 드라마로 번역하면서 동시대의 테크놀로지의 속도를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떻게 체화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예 ‘페이스북 창안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셜 네트워크>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속도를 영화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이 영화를 만들며 데이빗 핀처가 배우들에게 대사속도를 높여달라고 주문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 영화의 한글자막은 영화관람을 방해할 정도로 엄청난 양과 속도로 전개된다.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막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영화가 갖고 있는 빠른 속도의 리듬 그 자체를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대사의 속도가 가장 빠른 장면 중 하나다. 술집에서 마크 주커버그와 그의 여자 친구 에리카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광속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커버그의 대사는 특히 더 빠르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영화를 시작하는 건 대중영화로서는 다소 불친절힌 태도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영화로서의 태도에 대한 부담감조차 던져버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속사포로 대사를 쏟아내는 두 인물을 보여주길 계속한다. 그러다가 영화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크레딧 시퀀스에서 갑자기 속도를 늦춘다. 술집에서 기숙사까지 걸어가는 주커버그를 보여주는 비슷한 길이의 쇼트들이 여러차례 길게 이어지는데, 그 느릿함에서 이상한 긴장감이 발생한다. 기숙사로 들어간 주커버그는 곧장 노트북을 펼치고, 다시 영화는 음악과 함께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영화에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크레딧 시퀀스의 간격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크 주커버그는 교정을 통과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특히 <소셜 네트워크>가 염두에 두었던 테크놀로지의 속도란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네트워킹 기술의 속도였을 것이다. 영화가 고민했던 것도 넷 상에서처럼 말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와 말이나 생각을 실행할 때 발생하는 운동 속도의 삼박자를 어떻게 일치시켜 보여줄 수 있을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빠른 대사 속도는 인터넷 시대의 속도를 물리적으로 전달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현실은 속도전이다. 모두에게 오픈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빨리 결승점에 도달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경기의 법칙이 더 냉혹하게 작용한다. 이를 마크 주커버그는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윙클보스 형제는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 해도 시대착오적이고 솔직하지 못한데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현실 원칙에 얽매여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속도는 주커버그가 네트워크 상의 속도를 대사를 통한 물리적인 질감으로 전달하면서 만들어지는데, 윙클보스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그게 그들이 이 영화에서 우습게 보이는 까닭이다.

윙클보스 형제가 참가한 런던에서의 조정 경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잉여적인 부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조정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미니어처 모드로 촬영된 이 장면은 말 그대로 속도전의 재현이다. 조정 같은 스포츠 경기만한 속도전이 또 있을까. 선수들이 직접 노를 젓고 관람객들이 육성으로 응원하는 이 스포츠는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그러나 그 차원이 반드시 상위의 질서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조정 경기 장면에서는 스포츠 경기와 인터넷 상에서의 속도전, 둘의 위상이 뒤바뀐다. 인터넷이야말로 그 자체가 속도전이고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고안한 페이스매쉬는 스포츠 경기처럼 진행된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냉혹한 속도전이 스포츠 경기에 비유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스포츠 경기에서는 냉혹함이 증발해버린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속도전쟁에 비하면 신사적인 예절을 지키며 경쟁해야하는 스포츠는 진짜 스포츠, 인터넷이라는 더 현실적인 스포츠를 흉내 낸 미니어처일 뿐이다. 페이스북을 누가 더 빨리 만들어 더 빨리 보급하느냐가 진짜 스포츠다. 윙클보스는 속도만 느린 게 아니다. 그들의 미숙함은 무엇이 더 현실에서 의미 있는 경기인지, 진짜 스포츠에서는 어떤 무질서함과 살벌함이 통용되는지에 대해서마저 무지한 데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속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속도 자체는 어떤 물리적인 속성을 명시하는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속도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소셜 네크워크>에서 속도는 인격의 일부분이다. ‘실시간 블로깅’은 주커버그의 일부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연애상태를 실시간으로 게시할 수 있는 사용자들에게도 신속함은 곧 그들의 인격과 직결된다. 그들은 인터넷의 속도를 빌어 자신의 인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인정받는다. 다시 말해 인정투쟁이 곧 인터넷의 속도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커버그가 에리카와 헤어진 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에리카에 대한 험담을 블로그에 올릴 때, 또 술집에서 재회한 에리카에게 보기 좋게 당한 뒤 기숙사로 돌아와 페이스북의 신속한 확장을 주장할 때, 주커버그는 속도가 인정투쟁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상대보다 빨리 상대보다 먼저 결승점을 통과해야 우승을 하듯이, 상대보다 빨리 실연을 고백하고, 상대보다 빨리 상처를 극복하고, 상대보다 빨리 복수하고, 상대보다 빨리 더 나은 사람을 만나고, 상대보다 빨리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속히 선전해야 한다. 속도전이 되어버린 인정투쟁이야말로 스포츠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인정투쟁이 속도전이 되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테크니컬 하지만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인정투쟁이란 것 자체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감정을 오래 지속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속도전의 인정투쟁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자문할 때, 영화는 주커버그의 표정으로 답한다.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기는 최소한의 근육들로 감정의 신속한 순환과 소비를 표현해내는 데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계속해서 누르는 ‘새로고침’ 버튼처럼, 그의 얼굴도 계속해서 새로 고쳐진다. 하지만 유일한 친구,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었던 사람들, 돈을 받고 자신을 옹호해 준 변호사, 그리고 마지막까지 호기심어린 친절을 베풀었던 변호 참고인마저 방을 나간 뒤 홀로 남은 주커버그의 얼굴은 텅 비어버린다. 그의 눈빛은 노트북 화면 너머의 어떤 지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에리카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주기적으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크레딧 시퀀스의 리듬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주커버그가 만든 ‘페이스매쉬’나 페이스북이 모두 에리카를 향한 인정투쟁이었다면, 그 인정투쟁을 어떤 속도로도 쟁취할 수 없을 때 정지된 얼굴에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 헛걸음질치는 욕망만이 남아있다. <소셜 네트워크>는 새로운 속도의 시대 속에서 인정투쟁이란 고전적인 주제를 새로운 속도로 풀어낸 셈이다.

얼굴은 그러나 <벤자민>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요소다. <벤자민>은 테크놀로지를 사유하기 위해 얼굴을 끌어들인다. <소셜 네트워크>의 오프닝 만큼이나 <벤자민>의 오프닝 역시 이 영화의 탐구의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벤자민>은 클로즈업 화면에서 시작한다. 나이 든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눈 클로즈업에서 서서히 줌 아웃하면서 얼굴 클로즈업까지 한 쇼트로 끌고 가는 오프닝 쇼트는 곧장 이 영화가 얼굴을 중요하게 다루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벤자민>에서 브래드 피드의 얼굴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어떻게 배우의 얼굴이 갖고 있는 고전적인 아우라를 유지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섬세한 시험장이다. <벤자민>의 편집이나 촬영은 사실 평범한 편이며, 내러티브에도 소설에 비해 풍부함이 축소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배우의 얼굴의 배합 비율에 대해 심하게 파고든 영화도 드물 것이다. 많은 애니메이션과 3D 영화들이 기술을 전달하기 위해 플롯과 표정을 쉽게 포기해 버릴 때, <벤자민>은 애니메이션 기술이 얼굴의 표현력을 얼마만큼 강화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한 인물을 모든 나이에 걸쳐 묘사하기 위해 이 영화가 들이는 노력은 어마어마하다. 영화의 특수효과팀은 주름의 정도, 피부의 질감, 머리카락 색의 농도, 검버섯의 면적 등 사소한 세부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벤자민이란 인물을 재현했다. 그것도 한 시기의 얼굴만 만들었다면 좀 더 쉬운 일이었겠지만, 나이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좀 더 변형된 막을 사용해야했다.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브래드 피트에 씌운 멤브레인 막은 조금만 잘못 손대도 망가질 정도로 섬세해 정밀한 분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얼굴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벤자민의 얼굴에는 어딘지 지나친 면이 있다. 이 지나침은 과하게 섬세한 얼굴표면의 변화에서 비롯되는데, 관객이 육안으로는 짚어낼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으로만 느껴지는 수준이다. 이는 말하자면 잉여다. 영화는 거의 리얼리즘의 강박에 붙들린 것처럼 노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단순히 나이의 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말 그 나이를 살고 있는 인물의 느낌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늙은 벤자민의 몸은 브래드 피트의 몸이 아니라 어느 노인의 몸을 빌려와 합성한 것이다. 이는 영화적으로 필요한 묘사의 수준을 넘어선다. 하지만 핀처의 영화들에서는 이 잉여가 영화의 키를 쥐고 있을 때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조정 경기 장면이 인터넷에서의 속도전이 사실상의 현실 감각을 지배해 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면, <벤자민>에서는 벤자민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진입했을 때 배우의 얼굴과 표정이 어떤 기술적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변화란 그렇게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배우의 얼굴이 테크놀로지에 모두 자리를 내어줄 필요는 없으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벤자민>에서 벤자민도 브래드 피트라는 실제 배우의 존재를 빌려서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란 허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어떤 배우의 물리적인 몸을 빌려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란 배우와 허구적인 것이 만나 발생하는 효과 같은 것이다. 벤자민 역시 컴퓨터 그래픽과 배우의 얼굴과 대역배우의 몸과 관객의 심리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만들어진 하나의 효과로서 존재한다. 벤자민을 탄생시킨 건 방대한 양의 정교한 그래픽 기술이기도 하지만, 벤자민을 연기하는 배우이자 개별적 인격체로서의 브래드 피드 덕분이기도 하다. 배우를 어떤 역할이나 캐릭터로 기억할 수 있듯이, 역할이나 캐릭터 역시 배우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육체나 태도를 통해 기억될 수 있다. 관객은 벤자민이 가상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한편으론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임을 전제하고 그를 바라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역의 몸과 그래픽 기술을 버무려 만든 벤자민이 진짜 존재하는 인물처럼 실감되는 것이다. 여러 조각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게 배우의 존재감이다. 관객은 브래드 피트라는 하나의 배우를 관찰하듯이 벤자민 버튼을 관찰한다.

특히 영화에서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그 인물이 잡지 사진에서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계속 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광고 지면에서는 배우의 유명세만 필요 없다면 얼마든지 그래픽으로 완벽한 얼굴을 찍어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동성을 갖고 있는 영화에서는 배우의 얼굴은 여전히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표정은 배우의 얼굴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나 <벤자민>과 달리 그보다 일찍 만들어진 <조디악>은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테크놀로지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유일한 영화다. <세븐>의 소재가 된 사건으로 돌아간 핀처는 모든 테크놀로지를 걷어내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온갖 기교들도 덜어내고, 157분에 걸쳐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다. 하지만 이 영화마저 테크놀로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다. 이제까지 얘기한 두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속성을 하나는 리듬으로 다른 하나는 얼굴이란 표면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본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억제하고 다른 방향을 택한다.

테크놀로지와 속도의 측면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매체와 어느 정도 친밀성을 갖는다면, <조디악>은 그와 반대로 드라마들에 반작용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안정적인 장르로 자리 잡은 과학수사물들은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전시하거나, 의사, 검시관, 과학자, 심리학자 등의 주인공들을 앞세워 고도의 기술적 전문성을 표방한다. 반면 <조디악>은 근대적 합리성을 지닌 과학적 도구들을 은근 슬쩍 옆으로 치워버린 채 단지 퍼즐 때문에 사건에 매달리는 만평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를 등장시킨다. 그레이스미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신문을 스크랩하고 먼지 쌓인 창고를 뒤져가며 범인을 좇는다. 2010년 버전의 홈즈보다도 더 오래된 방법으로. 물론 이는 1970년대에 일어난 사건을 거의 고증하듯이 충실하게 재현하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수사물이 넘쳐나는 지금의 세기에 삼십 년이 지난 사건을 크게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놓고 보여준 까닭은 무엇일까.

<조디악>은 사건들에 무리한 논리를 부여하려하지 않는다. 대신 단지 사건들을 늘어놓는 방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보가 이동하는 방식, 사건들의 점과 점이 이어지는 방식이 드러낼 뿐이다. 어차피 어디까지가 조디악이 저지른 살인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도 여전히 논란거리인 실제의 미제 연쇄살인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가 사건들을 질서정연한 이야기로 억지로 정리해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2년에는 DNA 분석까지 했지만 조디악 킬러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사건의 점들을 이어보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폴 에이버리와 데이빗 토스키가, 후반부에서는 그레이스미스가, 사건의 점들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레이스미스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후반부의 리듬감은 특히 훌륭하다. 조디악의 편지가 대중으로부터도 잊히고 조디악 사건이 관계자들로부터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뒤, 그레이스미스는 각 관할 조사관들, 필적감정가, 옛 동료 기자, 담당 검사를 찾아다니며 직접 단서들을 조합해 나간다. 이런 그레이스미스의 영화적 운동은 점들 사이에 벌어져있던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간다. 하지만 토스키도 강력반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필적감정가도 불명예퇴직자였던 것을 알게 된 그레이스미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살인마 조디악이 아니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바람에 날려 보내듯 과거의 흔적을 서서히 조금씩 지워나가는 시간.

그러한 시간을 물리적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그러므로 당연하게 느껴진다. 속도와 기술의 시대에 이런 느린 속도로 범죄 사건을 늘어놓은 대로 보고만 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이나 게임, 모바일의 시대에 영화는 즉각적인 내비게이션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다른 매체와 비교해 수용자의 인내심을 더 많이 요구한다. 유혹적인 스펙터클 없이 두 시간이 넘는 영화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조디악>은 그런 물리적 조건 아래에서도 지루하게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을 밀고 나간다. <조디악>에서 핀처의 과잉적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시간을 곧이곧대로 나열하는 방식일 것이다. 마치 <벤자민>에서 얼굴의 주름을 하나하나 세공하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처럼, <조디악>은 수십년의 시간을 시간 단위, 주 단위, 연 단위로 쪼개어 늘어놓는다.

단순히 서사적 흥미나 스펙터클의 유혹을 넘어서 물리적인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 <조디악>의 가장 영화적인 면모다. 리얼타임을 표방하는 <24시> 같은 드라마도 드라마틱한 극적 구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시간의 탑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조디악>이 롱테이크로 시간을 지탱하는 예술 영화는 아니다. 쇼트도 많고 편집도 느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조디악>이 나름의 리듬을 통해 시간의 무게를 전달하는 게 더 신기해 보인다.

한 가지, 범인의 심리에는 별다른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는 무심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범인을 좇는 이들의 욕망, 특히 그레이스미스의 욕망에만 약간의 관심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무심함 때문에 영화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사건의 표면의 아래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범인의 욕망,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그런 것들을 굳이 영화 속에 정서로 끌어들여 보는 이에게 억지로 심어주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어떤 과학적 수단과 근대적 질서와 법적 정의를 동원해서도 풀 수 없는 심원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조디악>은 마치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서를 조작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실재를 전달하기 위해 그냥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도, 혹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일수록, 테크놀로지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핀처의 최근작들은 테크놀로지의 효과에 대해 사유하면서도 끝에는 테크놀로지로도 어쩔 수 없는 허무한 지점에서 멈춰 선다. <조디악>의 서행하는 리듬은 <소셜 네트워크>의 초특급행의 리듬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의 속도는 완전히 반대다. 하지만 전혀 다른 속도의 두 영화에는 모두 어떤 공백,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멍한 눈으로 모니터 너머를 응시하는 주커버그와 비로소 범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그레이스미스. 두 사람을 비추는 각 영화의 마지막을 지배하는 정서는 허무함이다. 너무 멀리 와버린 이 자리에서, 그들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멈춰서는 핀처의 영화들은 앞으로 무엇을 더 보여줄까. 잔혹한 스릴러로 돌아갈 그의 다음 영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