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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현진의 미드앤더피플] 평범함의 매혹
안현진(LA 통신원) 2011-07-01

<너스 재키>(Nurse Jackie)의 이디 팔코(Edie Falco)

<너스 재키>

병원은 드라마를 위한 완벽한 공간이다. 의사와 간호사 등 상주하는 인물에 더해 가벼운 상처에서부터 위급한 상태까지 다양한 환자의 상황과 각자의 사연을 가진 온갖 군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1963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48년간 이어져온 미국의 일일드라마 <제너럴 호스피털>이나 15년간 방영되었던 <ER> 등이 오래 사랑받을 수 있었던 비결에는 병원이라는 드라마틱한 공간의 힘도 포함될 것이다. 두 장수 드라마와 비교하기는 힘들어도 나름 장수 중인 <그레이 아나토미>와 <하우스> 역시 각각의 특색은 있지만 의사가 중심에 놓였다는 점에서 이전까지의 의학드라마들과 궤를 같이한다.

2009년 여름에 첫 시즌 방영을 시작해 현재 시즌3가 방영 중인 <쇼타임>의 <너스 재키>는 병원의 중심은 간호사라고 선언하는 색다른 의학드라마다. 뉴욕 올세인츠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이 TV시리즈는 “의사는 진단하고, 간호사는 치유한다”는 주인공 재키의 철학을 기저에 두고, 기존의 의학드라마가 그려냈던 의사 중심의 역학을 뒤흔든다. 간호사, 응급요원, 약사 등 의료진들이야말로 병원을 매끄럽게 돌아가게 하는 필수적인 존재라는 것. 사실 <너스 재키>의 간호사들은 ‘백의의 천사’라기보다 보통 사람에 가깝다. 만원 지하철을 타고 부대끼며 출근하고, 상황에 불평하며, 근무시간에 땡땡이도 친다. 하지만 응급실에서 사망한 남자의 휴대폰으로 계속 걸려오는 여자친구에게 부고를 전하는 것도, 우체국에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우체통에 넣어 죽은 이의 하루를 마감해주는 일도 간호사들의 손에서 이루어진다. 참신한 역학관계에 더해 <너스 재키>는 주인공의 어두운 면에 집중한다. 허리에 통증이 있는 탓에 늘 (마약 성분이 든) 진통제를 달고 사는 재키는, 진통제 공급책인 약사 애인과 창고에서 정사를 나누다가도 교대시간이 되면 칼같이 응급실로 돌아가고, 집에 돌아가서는 충실한 아내이자 엄마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 영리한 드라마는 아내, 엄마, 간호사, 애인, 친구 등 재키가 가진 많은 역할들이 각각의 바퀴가 되어 이야기를 전진시킨다. 각각의 바퀴는 제자리에서 할 일을 다하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기보다는 분리되어 돌아간다. 그리고 이 바퀴들을 굴리는 연료가 바로 재키가 이미 중독상태에 이른 진통제다.

<너스 재키>의 재키는 <소프라노스>에서 토니 소프라노의 부인 카멜라로 8년간 살았던 이디 팔코가 연기한다. 2007년 <소프라노스>의 막이 내린 뒤, 팬들은 팔코가 2년 만에 새로운 TV시리즈로 돌아올 것을 쉽사리 상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카멜라로 살았던 영광의 그림자는 길었다. <소프라노스>와 <너스 재키> 사이 <30록> 시즌2에서 공화당원인 잭 도나기(알렉 볼드윈)와 열애에 빠져 고뇌하는 민주당 의원 셀레스트 커닝햄으로 출연해 큰 웃음을 선사한 바 있지만 팔코 역시 <소프라노스> 뒤 작품 선택에 까다로워진 자신의 기준 탓에 주저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너스 재키>의 대본을 받아본 순간, TV시리즈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 연구의 매력에 푹 빠졌고, 그렇게 이디 팔코는 짧은 머리와 스크럽스(수술복) 차림의 재키로 돌아왔다. 그리고 시청자 역시 카멜라와 작별하고 재키를 만났다. 1993년 <호머사이드: 라이프 온 더 스트리트>의 에피소드에 단역으로 출연한 팔코를 눈여겨보았다가 <오즈>의 고정출연진으로 캐스팅해 TV시리즈로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던 연출자 톰 폰타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디는 꾸밈없이 연기하는 유일한 여배우다. 명료함과 정직함, 이 두 가지가 그녀의 전부다. 그런데 부족함이 없다. 그것이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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