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TView
[유선주의 TVIEW] 비천한 아름다움

<미스 리플리> 속 거짓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MBC드라마 <미스 리플리>.

거짓말하는 얼굴을 들여다보길 좋아한다. 진짜 말고 드라마 주인공들의 절박한 거짓말에 한정해서. 일상생활의 거짓말은 대개 아무렇지도 않은 말간 얼굴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거짓말의 스펙트럼을 펼치는 배우들의 얼굴에 매료되는지도 모르겠다. 훌륭한 거짓말 연기는 인간의 마음을 잠시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의 순간을 선사한다. 거짓말하는 연기는 인물의 내면을 숨기면서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배우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순간이 아닐까 한다. 물론 오열하는 연기의 함정과 마찬가지로 신체와 감정 통제가 안되면 그야말로 민망 대폭발이더라. 아무튼 요 근래 여주인공의 절박한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리는 드라마가 풍년이라 덕분에 그 얼굴들을 실컷 구경하는 중이다. <욕망의 불꽃> 윤나영(신은경)에 이어 <로열 패밀리>의 김인숙(염정아) 그리고 <미스 리플리>의 장미리(이다해)까지.

콤플렉스 덩어리 윤나영의 변검 같은 얼굴은 위선과 위악 사이의 진심을 파악하는 것조차 피로한 지경까지 몰아쳤고, 명민한 머리로 각본을 짜고 그것을 완벽하게 연기해내는 김인숙의 얼굴은 너무 매혹적이어서 그녀의 ‘구원’을 만류하고 싶은, JK그룹을 접수하고 내친김에 세계정복까지 권유하고 싶은 지경이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박복한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장미리는 일본인 양부모의 빚을 갚기 위해 호스티스 생활을 하다 무작정 한국 땅을 밟는다. 정규직으로 취업하지 않으면 강제 출국될 위기에서 우연히 호텔 a의 이사 장명훈(김승우)에게 발탁되고 도쿄대 학력을 위조하는 것으로 거짓말이 시작된다. 설정상으로는 별반 특별할 것도 없다. 잦은 우연들이 지리멸렬하다고 내칠 수도 있고, 제 분을 못 이겨 콧김을 흥흥 내뿜는 이다해의 연기도 개인마다 취향이 갈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스 리플리>는 그간 생략되어왔던, 거짓말을 실행하는 과정을 되살린다. 장미리의 세계는 얼굴에 점 하나 붙이는 식으로는 거짓말이 완성되지 않는다. 도쿄대 졸업장을 위조하기 위해선 인쇄소 골목을 돌며 모욕을 당하고 발품을 팔아야 하고, ‘원본’이라는 아이템이 갖춰져야 한다. 거짓을 완성하기 전까지 목구멍에 무언가 치밀어 오를 것 같은, 금세 까무러칠 것 같은 초조함. 이런 건 여주인공의 몫이 아니었다. 여주인공이 ‘기회를 달라, 당신은 나의 진가를 모른다’는 식으로 감정적인 호소를 하면 보통은 통하는 게 여주인공을 대하는 한국 드라마의 상식이다. 한데 그것도 무너진다. 장명훈은 항의하는 장미리에게 그녀의 성격과 장점, 그 장점을 덮는 더 큰 단점까지 면전에서 낱낱이 까발린다. 보통 이런 식으로 근본을 간파당하면 우선 접고 후일을 도모하는 게 더 추한 꼴을 피해가는 길일 텐데 장미리는 ‘단 한번의 실수’에도 용서가 없는 장명훈의 인간성을 공격한다. 그런 그녀에게 장명훈은 접객기록 등 부정할 수 없는 근거를 들어 그녀의 태만과 무신경함을 증명해서 돌려준다. 이 광경이 정말 무시무시하다. 처한 상황이 아니라 인간 자체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몸서리가 쳐진다. 더이상 비참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에서 도망쳐온 세계, 자신에게 기회의 손을 내미는 그 세계 또한 고단하고 신랄한 것이다.

스스로 내뱉는 거짓말에 취해 있는 부끄러운 꼴을 등 뒤에서 모두 지켜봤던 남자, 그리고 썩은 동아줄이라 매도했던 남자까지 유혹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차한 상황의 여주인공이라니! 도자기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순간 내려앉는 비천함. 장미리는 ‘미스 리플리’다.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