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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미술과 과학이 만났을 때

<거짓의 미술관> 랠프 이자우 지음 / 비룡소 펴냄

박학다식한 작가의 사고실험. 목표는 미술품 도난과 진화론 비판과 인간복제 연구를 이야기 하나로 엮는 것이다. 시작은 도난 스릴러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의 헤르마프로디테 조각상이 폭파된다.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는 마그리트의 <경솔한 수면자>가 사라진다. 빈 예술사 박물관에서는 크라나흐의 걸작 <에덴 낙원>이 사라진다. 혐의자로 알렉스 다니엘스라는 미모의 은둔형 과학기자가 체포된다. 알렉스는 지난 몇년간 진화론이 지닌 허점을 날카롭게 공격해온 성과를 인정받아 상까지 받았다. 그렇다고 진화론과 대척점에 있는 창조론을 신봉하는 건 아니고, 진화론 또한 하나의 가설일 뿐인데 종교처럼 맹신되는 현실을 참을 수 없을 뿐이란다. 알렉스가 조각상 폭파범 혐의를 받은 이유는 그녀가 간 적도 없는 박물관에 그녀의 것과 거의 일치하는 지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란성 쌍둥이 사이에 지문이 매우 유사한 사례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이야기는 생명공학과 인간복제 문제로 이어진다. 마침 영국에서는 연구용 인간복제를 허용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을 곧 투표에 부칠 예정이라는 설정과 함께.

랠프 이자우는 소설 속 알렉스의 입장처럼 진화론을 공격하면 으레 창조주의자로 낙인찍히는 과학계의 현실이야말로 종교적 근본주의는 아닌지 짚어보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단다. 의견이 다르다고 상대를 완전히 뭉개버리지는 말자는 온화한 다원주의. 좋은 얘기인데 하나마나한 얘기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지적설계론이나 창조론은 무신론자에겐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노릇. 하나 어느 입장이든 간에 작가가 펼치는 지적 향연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인간진화단계설의 허점을 까발린 필트다운 두개골 위조 사건부터 스티븐 제이 굴드 같은 유명 학자의 이론까지 진화론의 현재를 폭넓게 진단한다. 주요 테마로 등장하는 헤르마프로디테는 남자와 여자의 성적 특징을 모두 가진 이를 지칭하는데, 이 소수자들이 처한 현실도 꽤 자세하게 알린다. 덧붙여 줄기세포 연구에 최근 몰두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도 잠깐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