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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나치 코스프레의 ‘구린 미감’

공연윤리와 공연미학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무대 위에서 나치 군복 퍼포먼스를 벌이는 바람에 인터넷에서 잠시 논란이 일어난 모양이다. 일각에서는 “전체주의에 맞서 자유를 옹호하기 위한 퍼포먼스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하고, 일각에서는 “나치에 숨진 600만 유대인들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트위터에 한마디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달걀귀신들의 공세가 시작된다. 아직 프로필 사진이 없어 달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의 계정에 들어가보면 대부분 팔로잉 0, 팔로워 0, 한마디로 나를 씹을 목적으로 트위터를 시작한 이들이다.

예술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허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치 복장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복장을 하고 나왔다 해도, 그걸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공연의 복장에까지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야말로 외려 우스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임재범은 논란을 예상한 듯 미리 윤리적 알리바이를 만들어놓지 않았던가. 그것도 행여 오해가 없도록 분명하게, 너무 안전을 도모한 나머지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확실히 만들어놨다. 아마도 그것이 불러일으킬 논란까지도 이미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복장에 윤리적 시비를 걸어야, 그가 짠 프로그램 속에 멋지게 갇히는 꼴이 될 뿐이다. 시비를 걸기에는 안전장치가 너무 많다. 행여 문제가 될세라 공연의 기획자는 미리 자물쇠를 이중, 삼중, 사중으로 채워놨다. “그의 대사는 들어봤냐? 그는 ‘노 히틀러’, ‘히틀러는 죽었다’고 말했다. 노래는 들어봤냐? 그 노래는 반전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 퍼포먼스에는 외려 자유와 저항이라는 록의 정신이 담겨 있다. 그가 노래를 시작하면서 나치 군복을 왜 벗어던졌겠는가? 그것은 자유에의 갈망을 표현한 것이다.”

본인이 그걸 ‘의도’했다는데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자신’의 의도를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잖아도 먹고살기 바쁜 대중은 자신이 느낀 ‘불편함’을 적절한 언어로 표현하는 데 곤란을 겪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관습적인 방식에 따라 문제를 ‘공연윤리’의 영역으로 가져가고 만다. 이로써 대중은 기획자(그가 누구든)의 의도에 낚인 가련한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만다. ‘퍼득퍼득.’ 이 덫에서 벗어나려면 문제를 ‘공연윤리’의 관점이 아니라 ‘공연미학’의 관점에서 다뤄야 한다.

록뮤직과 극우파

록뮤직에서 나치를 모방하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미 여러 그룹이 비슷한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으로 안다. 임재범의 것은 그것을 모방한 것이리라. 당장 생각나는 것은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이 뮤직비디오(혹은 뮤지컬영화?)에서 주인공은 환각 속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합쳐놓은 전체주의 지도자가 된다. 그의 광적인 연설에 대중은 히틀러 경례로 환호하고, 나치 당원과 검은 셔츠단을 합쳐놓은 듯한 우익분자들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테러를 시작한다. 환상은 “그만!”(stop)이라는 주인공의 절규로 끝난다.

여기서 독재자는 ‘허구’의 내러티브 속에 존재한다. 실존했던 나치의 의상과 상징이 그대로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전체주의 전체가 풍자적인 맥락 속에 존재한다. 임재범의 경우는 허구가 아닌 ‘현실’의 무대에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제복과 경례를 그대로 차용했다는 점에서 <더 월>과 다르다. 그렇다고 임재범이 진짜로 ‘나치 펑크’나 ‘나치 록’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치 록이 인종과 신념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한다면 임재범의 대사와 가사는 모범답안만큼이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이다.

임재범의 공연미학을 평가하려면 차라리 슬로베니아의 전위적인 록그룹 라이바흐를 참조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들은 전체주의 미학을 반영하는 제복 차림의 퍼포먼스로 때로는 ‘극좌’라고, 때로는 ‘극우’라고 비난을 받는다. 몇몇 성원은 민족주의 단체의 회원으로 활동하지만 몇몇 성원은 존 허트필드와 같은 다다이스트의 기법으로 제 이미지를 연출하기도 한다. “당신들은 파시스트가 아니냐”는 질문에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딱) 히틀러가 화가였던 만큼(만) 파시스트다.”

굳이 라이바흐의 정서에 가장 근접한 예를 역사 속에서 찾는다면 아마 이탈리아의 미래파를 꼽아야 할 것이다. 마리네티를 비롯한 미래파 작가들은 한때 공산주의에 동조했다가 뒤에 파시스트 정권에 협력했다. 그들에게 정치적 신념의 방향(좌우)보다 중요한 것은 기성의 모든 권위를 파괴하겠다는 아방가르드의 파토스였을 것이다. 그 파토스를 표출하게만 해준다면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들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극좌와 극우 모두로 의심받는 라이바흐의 멘털리티는 미래파의 그것을 닮았다.

사실 무대에서 전체주의 미학을 연출하는 데에는 다양한 예술적 의도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전체주의를 풍자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것을 찬양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예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비웃는 것일 수도 있다. 여기서 라이바흐 그룹은 자신들의 공연을 심각한 ‘오독’(misinterpretation)에 그대로 내맡겨둔다. 발터 베냐민은 어디선가 “파괴적 성격은 대중의 오해를 허용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말한 ‘파괴적 성격’은 아방가르드, 즉 전위주의자의 멘털리티와 일치한다.

임재범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공연이 끝나자마자 보도 자료를 통해 이른바 ‘해명’을 했다. 아니, 그 이전에 무대의 대사와 노래의 가사를 통해 자신의 복장이 불러일으킬지도 모를 ‘오해’의 소지를 미리 철저히 없애두었다. 구차하게 변명이나 해명을 늘어놓지 않고, 그냥 대중의 오해를 과감히 허용하고, 그들의 비난을 용감히 감수했다면, 비록 뒷북이긴 하지만, 그의 ‘도발’이 정말 ‘도발’이 될 뻔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안전운행을 택했고, 그 결과 그의 퍼포먼스는 한낱 구닥다리 코스프레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자유주의 윤리와 전체주의 미학

“꺅, 멋있어요!” 동영상 속에서 한 여성이 외친다. 실제로 나치 제복에는 미학성이 있다. 거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다. 즉 미국이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관점에서 대량생산에 적합한 실용적 디자인을 채택했다면 나치는 정치적 선전을 위해 군복과 무기의 디자인에서 이념적 표현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치 이념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야 했다. 그 제복이 멋있다고 느낀 것은 그 여성만이 아닐 것이다. 상당수 관객이 거기서 강한 인상을 받았을 거다. 아니, 그 이전에 가수도 그 미적 표현성 때문에 그 제복을 택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대사와 가사에서 전체주의 이념은 ‘부정’된다. 하지만 제복을 통해 전체주의 미학은 그대로 ‘긍정’된다(가령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에서 제복은 미적으로 부정적으로, 즉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대중이 느끼는 왠지 모를 불편함은 이 부정합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대중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얘기를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방식으로 하던 90년대 베네통의 얄팍한, 그러나 탁월한 사진 프로젝트처럼- 그 퍼포먼스가 어딘지 ‘위선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지적해야 할 것은 이 얄팍한, 그러나 탁월하지는 못한 연출을 낳은 구린 미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