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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침묵이 덮을 수 없는 것

<풍산개> 속 풍산이 실패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이유

<풍산개>는 분단의 정황을 이야깃감으로 삼은 일단의 한국영화들이 부려놓은 장르적 기대 위에 서 있는 작품이다. 물론 김기덕이 각본을 쓰고 제작까지 한 까닭에 몇 가지 설정은 노골적으로 김기덕의 작풍을 계승하고 있지만 ‘김기덕’은 이 영화를 논평하는 유용한 열쇠어가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실어증에 걸린 허깨비 같은 주인공이 활약하는 이야기라는 것이나 그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라는 것(카메라를 통한 자기 반영성은 최근 김기덕 영화에 빈발하는 형식적 모티브다), 그와 관련된 인물들이 하나같이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 외에 한 실향민 노파의 입을 통해 노래 <아리랑>을 부르게 한다는 사실 정도가 김기덕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이유로 김기덕을 불러오는 것은 <풍산개>에 대한 바른 독법이 되지 못한다. 도리어 <간첩 리철진>(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웰컴 투 동막골>(2005), <의형제>(2010)로 계승되고 있는, 허다하게 반복 재생산된 분단 드라마의 연장으로 읽을 때 명확해지는 지점들이 있다. 그렇다면 <풍산개>는 분단 드라마라고 하는 다분히 한국적인 이 장르 서사의 진화에 얼마간의 유의미한 보탬이 되고 있는가, 내처 그간의 분단 드라마들의 공과를 넘어서는 갱신된 문제의식을 던지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이같은 가치판단에 유익이 될 것이다. 이 문답에 대한 나의 생각은 회의적이다.

실패한 추상화

<풍산개>의 연출 작의를 요약하면 ‘남북의 첨예한 대치 상황을 우화적으로 빗댄 한편의 추상화’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추상화’라는 수사에 대해서는 약간의 주해가 필요하다. <풍산개>는 현실 세계의 논리나 정세와는 거리를 둔 채 해묵은 남북간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파생한 아이러니를 추상적인 알레고리로 풀어나가는 이야기다. 시대적 정황의 추상화 작업에 매진한 이 알레고리 서사는 구태여 이야기의 핍진성에 연연하지 않으려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야기는 말이 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가정하고 출발한다. 세 시간 만에 서울과 평양을 왕복하며 이산가족의 유품이나 심지어 사람을 데려오는 배달부가 있다는 설정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다. 장르 서사 안에서 보통 이런 초월적인 존재가 영화에 등장할 때 그가 행사하는 초인적인 능력은 그가 세계와 맞서는 방식으로 형상화되곤 한다. <풍산개>의 과묵한 주인공(윤계상)에게도 이런 방식이 통용된다. 상상을 초월하는 스피드와 전투력, 어떤 장벽도 손쉽게 비월할 수 있는 이 남자(편의상 ‘풍산’이라고 부르겠다)의 도약의 능력은 남과 북의 이념적 장벽을 은근히 조소(嘲笑)하는 초인의 풍모를 재현한다.

이처럼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을 태연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풍산개>의 형상화 전략이라는 것에는 이론을 달 수 없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건 소설이나 영화 같은 이야기 예술에서조차 치명적인 결격사유가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심각한 흠결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사례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철저히 계산적이고 치밀한 이야기의 논리에 의지하는 미스터리 장르랄지, 서서히 달아오르는 서사의 진행이 완숙한 클라이맥스로 이어지는 단계적 진행형 플롯에서는 유달리 서사의 논리적 핍진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풍산개>는 위의 두 사례에 해당하지 않을뿐더러 김기덕이 각본을 썼기 때문에 관객은 이야기의 투박함을 어느 정도 용인하고 넘어갈 태세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핍진성에 개의치 않는 이 영화의 자유로운 발상이 연출자의 뚝심인지, 예술적 결기인지 또는 작금의 첨예한 남북 대치 상황이 야기한 자괴와 절망의 상태를 진단하려는 작의에 따라 편리하게 타협한 결과인지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MB정권이 들어선 이래 바람 잘 날 없는 남북 대결구도에 의해 공생과 화해의 무드가 사라진 오늘날의 남북정세가 <풍산개>의 창작동기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김기덕의 후방 지원을 받은 전재홍의 영화적 형상화 전략에서는 몇 가지 납득되지 않는 요소가 발견된다. <풍산개>는 개념적인 추상도, 그렇다고 완전한 구상도 아니며, 둘의 의뭉스런 혼합을 의도한 것 같지도 않는 애매한 모양을 하고 있다. 서사의 치밀함이 요구되는 경우들과는 반대로 이야기나 그것을 보조하는 스타일의 완결성에 대한 저항이 정당화될 수 있는 예외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내러티브의 헐거움이나 구조적 결함, 극적 개연성을 저버리는 행위가 작가의 미학적 전략이나 결단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래서 꽉 짜인 구조와 형식을 파괴하는 일탈을 하나의 미감(美感)으로 인정할 수 있을 때 텍스트의 완결성은 부정될 수 있다. 또 다른 사례라면 고질적인 사실주의 미학에 대한 반기로서의 꿈과 환상, 공상, 망상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들에서 서사의 개연성은 종종 뒷전으로 밀려나기도 한다. 애석하게도 <풍산개>는 위의 두 예외사례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 영화를 다 본 뒤에도 텍스트 뒤에 어떤 열망이 숨어 있는지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그것이 미처 헤아리지 못한 심오한 작의나 중층적인 의미망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이 진짜 문제다.

이산 혹은 실향의 아픔을 위무하는 것으로 보이는 도입과 결말의 수미쌍관 구조를 내장한 <풍산개>의 몸통 서사는 북에서 온 여인 인옥(김규리)과 풍산의 로맨스, 한 인간을 이용가치로만 점수 매기는 체제의 교활함 등으로 화제를 갈아타면서 가쁘게 전개되고 있다. 변화무쌍하게 화제를 바꾸는 이야기는 건드릴 수 있는 주제를 모두 건드리는데, 너무 많은 쟁점을 구겨넣어 체증에 걸린 것 같은 인상이다. 서사의 체기를 해소하고 중구난방의 이야기 조각들을 블랙홀처럼 흡수하는 것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말을 하지 않는) 풍산이다. 곧 풍산의 인물됨됨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풍산개>의 추상적 알레고리 방식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풍산은 영화가 구현하려는 주제를 응축하는 인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인물창조 과정에 체제의 모순과 이데올로기 쟁투의 허망함이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기 때문이다. 태생이나 근본, 배경, 사상을 유추할 수 없는, 곧 하나의 ‘캐릭터’라고 부를 수 없는 이 미스터리한 인물의 팔모를 뜯어본다면 풍산은 일종의 ‘슈퍼히어로’다. 어떤 장면들에서 그는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에 버금간다. 장대높이뛰기로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면서 세 시간 만에 서울과 평양을 오갈 수 있는 사람이 초월적 영웅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문제는 이 초인의 아이덴티티가 의도된 궤도로 이야기의 흐름을 끌고 가기 위해 편의적으로 모습을 바꾼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슈퍼히어로 풍산의 능력치는 탄력적으로 운용된다. 수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을 간단히 무력화하고, 지뢰를 밟고도 무사하며, 장대높이뛰기로 철의 장벽을 비월하는 신출귀몰한 이 남자는 북에서 망명한 고위 간부의 광기 앞에서는 순한 양처럼 온순해지고, 남과 북의 정보원들에게 차례로 인질이 되어 목불인견의 문초를 당한다. 물론 풍산의 풍모가 초인에서 범인을 오가는 것은 이 구체성을 결여한 캐릭터에게 분단 이데올로기의 아이러니를 몸소 체험시키기 위한 선택일 것이다. 문제는 그 과정이 전혀 흥미롭지 않다는 점이다. 최초의 신념을 배반하며 흔들리는 캐릭터 구축의 과정을 따라가노라면 다소간 맥이 빠진다. 풍산의 인물됨에 부여된 개념의 질적 수준이 깊이있는 통찰을 주지 못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종잡을 수 없는 갈지자 행적을 그리는 것은 주인공 풍산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도식적인 서사 전개의 보조자 역할로 편의적으로 활용되고 버려진다. 북의 고위급 간부였다가 전향한 망명 남자(김종수)는 인옥이 연심을 품은 풍산을 시기한 나머지 조증과 울증을 오가며 볼썽사나운 광란극을 연출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남자의 광기와 폭력은 인간적 결함이나 정서불안의 징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느 쪽도 아니라서 이렇게 불안하고 외로워”라며 미쳐 날뛰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지만 되레 그 생뚱맞은 직설화법이 이야기의 격을 떨어뜨린다. 남한의 국가정보원 요원들은 비웃음을 자초할 만한 얼뜨기로 묘사되는데, 특히 풍산의 도움을 받아 북으로부터 탈출한 한 사내는 좀비처럼 어기적거리다 종적을 감추더니 후반부에 홀연히 나타나 아이러니한 남북 대치 상황을 목도하는 증언자 역할을 한다. 제대로 빛을 보는 캐릭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인물들이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마는 인상이다. 최소한 이데올로기나 사랑 따위의 어떤 관념으로도 포박되지 않는 개념화된 캐릭터로서 풍산은 더 단단하게 구축될 수 있었다. 인위적인 구도로 짜인 이야기의 흐름에 무연히 던져진 이 추상적 존재 역시 인공적인 창조물의 냄새가 너무 짙게 풍기는 탓에 서사의 틈을 벌리거나 어떤 해체적 쾌감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새로울 것 없는 재생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더 심화해보자. 풍산은 왜 실패한 캐릭터가 되었는가? 주인을 잃은 딱한 운명의 풍산개와 동일시되는 이 목석같은 사내의 존재의의를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해할 수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남과 북의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데드 존(Dead Zone)에 거하는 풍산은 이데올로기의 대결구도로부터 벗어난 연기와 같은 인물로 형상화된다. 피에서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사람이 맞느냐?”는 말을 곧잘 듣는 그는 일체의 경계를 무력화하는 유령 같은 존재다. 약속된 시간 안에 물건을 실어나르는 퀵서비스 기사처럼 이산가족들의 서신과 유품을 배달하는 풍산의 미션은 체제의 모순으로 생이별한 남과 북의 가족들을 상봉하게 하는 가교로 구실한다. 이상으로 봤을 때 풍산은 실체가 없는 관념의 형상이거나 상징적 장소성을 갖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풍산이 구현하는 관념이란 무엇인가? 풍산의 언어화되지 않는 행위들 안에는 우리 시대의 어떤 관념이 응축되어 있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우리 시대의 불행을 치유할 임무를 어깨에 걸머진 슈퍼히어로다. 위에서 슬쩍 드러난 바와 같이 풍산은 지난 몇년간 퇴행적 경색 국면을 이어온 남북의 화해를 매개하는 날렵한 메신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인 철조망보다 험준하고 위협적인 장벽, 그 까마득한 장애물을 뛰어넘는 신뢰와 화해의 화신. 이 지점에서 <풍산개>는 이러한 주제에 걸맞은 메타포를 찾으려고 애쓴다. 그러나 그 과정 역시 흥미롭지 않다. 핍진성의 지배를 받는 영화의 리얼리즘으로부터 독자적으로 서 있는 이 관념으로서의 캐릭터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처럼 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괴상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면서 싹튼 풍산과 인옥의 애틋한 로맨스를 이해하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거의 어떤 징후도 없이 불타오른다. 두 사람의 감정의 진화과정에 대한 정서적 동기화는 가장 단조로운 대사만을 읊조리는 김규리의 어색한 북한 사투리 연기로 설명되지 않는다. 미흡한 동기화를 상쇄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은 “짧은 시간 오시는 동안 정이 많이 드셨나 봅니다”와 같은 남한 정보원들의 설명조 대사들이다. 과묵한 풍산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너무 말이 많거나 이런 설명조 대사로 일관한다. 그들은 말하지 않는 풍산의 ‘확성기’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풍산이 할 법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대신해주는 것처럼 극의 상황과 인물의 감정이 대사로 중계된다.

인물의 전형성을 완연히 비껴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면 풍산은 더 반짝이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침묵으로 가려지지 않는 풍산의 일관성없는 성격화 방식은 이야기의 국면마다 수시로 모습을 바꾼다. 그를 비롯한 대다수의 인물들이 지조있는 성격화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건 유감스러운 일이다. <풍산개>는 남북간의 체제 대립이 잉태한 참극, 수많은 분단 드라마에서 되풀이 해 다뤄진 해묵은 주제를 다시 한번 재생하는데, 이 새로울 것 없는 재생을 위해 인물들이 속절없이 소모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틀거리기는 하지만 여하튼 전진하는 이야기가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최종적으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조소의 대상이 되었던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의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이다. 공간적 좌표가 모호한 풍산의 거처에서 남과 북으로 패를 갈라 이전투구를 벌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이 이야기의 주제를 감안하더라도 끼워맞춘 듯 도식적이고 억지스런 느낌이 있다. 어떤 해소의 기미도 없이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비무장지대 갈대숲을 질주하다 비상하는 풍산의 이미지로 수습된다. 물론 진지한 작품의 목적은 문제를 보여주는 것이지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이 영화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풍산이라는 개념화된 캐릭터가 구현하는 추상화된 알레고리이다. 그런 의미에서 <풍산개>의 주제의식과 그 구체적 실현이라 할 인물 풍산의 관계는 더 돈독하게 빛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도식적 의미화에 강박된 나머지 이야기가 듬성듬성 건너뛰고 작중인물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영화는 파고들려 한 주제에 대한 예각적 인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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