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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신문 시나리오 공모 당선, 타협을 몰랐던 작가 최금동(2)
2002-01-09

“죽어도 타협은 못한다, 아무 거나 쓸 수 없다”

근데 그거하기 전에 더 재미있는 것이, 여그 올라와 가지고 무엇부터 시작했는고 하면 현미 빵 장사부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남대문통5가라고 하지요. 거기서 하숙을 하는데 그 일가 되는 사람에게 딸이 하나 있어요. 김명희. 그 딸하고 나하고 가까웠어요. 그게 말하자면 첫사랑이라면 첫사랑이죠. 그런데 그 어머니가 나하고 가깝게 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러냐? 가세가 어려워서 고학을 하고 있는데 언제 자기 모녀를 건사하는가 말이지. 그러다가 그 여자가 그 소녀를, 그 동네 정총대(町總代)라고 하죠(지금의 동장(洞張)에 해당하는 일제시대 행정직 중 하나. <삼대> 등의 소설에서도 권력이나 축재와 연관된 인물로 묘사되며 실제로 전시체제에서 공출, 징병 등을 독려하는 지역조직의 세포로 기능했다.- 필자) 그 정총대의 소실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얘가, 명희가 몹시 울었어요. 며칠 울더니 얘가 행방불명되어버렸어요. 알아보니까 자포자기 해가지고 그리 소실로 갈라면 차라리, 그때는 만주 모란강(牧丹江)으로 여자들이 많이 팔려갔어요, 그냥 자진해서 팔려갔다는 거예요.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 실연에서 오는 충격이 커서 처음으로 술을 먹어보기도 하고 자살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기도 하고.

나중에 <동아일보> 시나리오 공모전에 낼 작품을 쓰던 중에 원고지를 사러 조지아, 지금의 미도파죠, 조지아 3층에 원고지를 사러가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김명희를 만났습니다. 하도 넋이 나가서 말이에요. 어쩔 줄을, 그러니까 팔려갔다는 사람이 왜 왔는가? 말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내려버렸어요. 말도 못하고, 나는 올라가고 있고, 그런 에피소드가 있죠.

소설을 아무리 읽어도 영화가 좋아

1936년에는 <고성>이란 시조를 써가지고 <동아일보>에 당선이 됐습니다. 그 무렵 서정주(徐廷柱)의 <벽>이 <동아일보>에 당선되었죠. 내가 그때는 소설을 많이 봤지요. 한국문학은 거의 다. 근데 거기서 받은 감동보다도 영화 <미완성 교향곡>에서 받은 감동이 훨씬 높았다 이거예요. 그래 그 시나리오가 쓰고 싶어서 그냥 학교 가다말구는 종로도서관에 갔습니다. 총독부 도서관이죠.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니까 무성영화 초창기 시절의 일본 작품들 몇 가지 시나리오가 나와 있어요. 요걸 보고 신은 이렇게 넣어놓고, 시퀀스는 요렇게 가져가고, 컷은 요렇게 되는 거고, 그리고는 단어들 몇개, 그래요.

동아일보에서 내건 조건은 명승고적을 솜씨있게 엮어놓으라 했는데 가본 일이 있어야지. 그래서 인제 평양에서 온 친구, 금강산 갔다 왔다는 친구, 몽금포 봤다는 친구들을 개별적으로 만나가지고 그 모습을 스케치하듯이 그렸어요. 시나리오의 내용이 뭔고 하면, 여자의 아버지가 평양서 사재를 다 털어서 사립학교를 세워서 인재양성을 하려구 하는데, 재단이 경영난에 빠져가지고 학교 교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 어떤 투자자가 하나 나섰는데 ‘따님하고 결혼시켜주시오’ 그게 조건이에요. 딸은 음악가의 애인이었죠. 학교 문은 교실마다 닫혀 있고 종은 울리지 않은 채 침통하게 매달려 있고. 결국은 아버지가 딸에게 사정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한 뒤에 이 여자가 폐를 앓다가 결국은 몰래 가출을 해버립니다. 그러니까 백만장자의 영부인이 가출을 해가지고 행방불명이라고 신문에 나고. 그 여자는 동해안에 있는 수도원의 수녀가 되어 있어요. 그때 이 음악가가 쫓아가서 새벽에 임종하는 데 마지막 대면을 하고 나와서 동해안을 바라보면서 탄식한다는 그런 내용이죠.

그래 그걸 써서 동아일보에 내가 직접 가져가 접수부에다 냈죠. 될라나 안 될라나, 그냥 마음으로는 초조하고 불안한데 어느날 인천으로 엽서 한장이 날아왔어요. ‘엽서를 받은 즉시 학예부로 상경해주길.’ 이 가슴이 뛰어서 말예요. 아, 그냥 달려갔죠. 학예부 부장님 찾으니까 나를 우아래로 쳐다보더니만 “여기 최금동이 왔다”고. 딱 스물한살 때죠. 한 며칠 있으니까 신문에 그야말로 거참. 요새말로 대문짝처럼 내 사진이 난 거지.

신문 시나리오 현상 모집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입니다. 그것이 요새 시나리오 기법하고는 달라서 반영화소설이었어요. 신문에 연재를 고려해서 그렇게 썼을는지 몰라. 하여간 그것을 <메밀꽃 필 무렵>의 이효석 선생한테 부탁해가지고 각색이 나왔죠. 내 시나리오를 신문에 연재할 때에는 삽화, 스틸이 없어서, 연재는 영화제작하기 전이니까 당연히 스틸이 없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일선 배우들이 직접 스틸 사진의 모델이 되어서 신문에 삽화 대신 실렸어요. 고것이 아마 처음 시도한 것일 겁니다. 거 돈 많이 들였어요. 그리고 돌아가신 김유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찍는 데 일년 동안 걸렸죠. 이 영화에 한국의 중견 문인들이 거의 총동원되었어요. 그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에요.

특종으로 이름 날렸던 사회부 기자

졸업께 신문기자를 시작했는데, 쭉 사회부를 맡았죠. 사회부 기자로서는 날렸죠. 특종기자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나는 나름대로 사회부 기자로서 주관있는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서울대 경성제대(京城帝國大學) 스가(須賀) 교수 사건. 이 스가란 사람이 경성대학 의과대학 교수인데, 이 사람 집 뒤 정원에 보성중학교 학생이 사색을 하러 들어갔다가 엽총으로 맞은 사건이 있어요. 그 사건을 폭로시켜가지고 결국은 학무국장, 총독부 학무국장, 서울대 시노다 총장까지 다 갈리고 스가는 유치장에 들어가고 동대문경찰서 서장 파출소 주임까지 감봉된 사건이 있었어요.

그러고 어느 기생이 음독자살한 사건이 있었어요. 왜 ‘깡’이라고 그러죠. 기생이 어렸을 때부터 팔려가는 것을, 그러면 어려서 사다가 권번에 넣어서 노래도 가르치고 해가지고, 머리 얹어주고 나이가 많아지면 다른 데다가 팔아먹는 거죠. 이제 그런 케이스예요. 그래서 이제 이 여자 자살한 사건을 각도를 뒤집어서 사회문제화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팔려 와서 빚에 매달려 있는 여자들을 총독부령으로 전부 석방했습니다. 해방시켜줬어요. 아주 중대한 사건이었죠. 내가 보람을 느껴요. 그 다음엔 인제 학병으로 끌려가는 사람들. 그것에 대해서 내가 매일같이 울었어요. 그 젊은애들이 우리의 마지막 재산이거든. 믿을 것은 그 애들밖에 없는데, 남편도 끌려갔지, 누이도 지금 정신대로 끌려갔지. 다 끌려가버렸는데. 그때처럼 내가 민족적인 자각과 의식 속에서 몸부림친 적은 없어요. 그러다가 인제 해방된 거죠. 내가 <매일신문> 사회부장, <서울신문> 사회부장으로 있다가 그만두기까지가 그게 아주 파란만장한데, 그것은 영화계 얘기하고는 너무 동떨어진 얘기여서 생략합시다.

비타협의 고독

신문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이 나왔죠(<새로운 맹서>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필자). 그때 신신다방에 가면 대영화인들, 연기인들이 많이 모였어요. 거기 나가서 만나기도 하구. 그때 인제 내가 쓴 것이 <해빙기>에요. 아, <해빙기>는 <매일신보> 기자 때 썼어요. 37년에 썼어요(“이거는 영화 안 되었죠?”- 대담 중의 이영일). 네, 영화 안 됐어요. 내가 생각해도 참 의욕적인 작품이었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쓴 것이 <오! 내 고향>이죠. 그 다음에 오십칠년까지 광주에 있으면서 <이름 없는 별들> <산유화> 다 거기서 썼죠. 그래가지고 인제 서울로 올라와서 시나리오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죠. 그렇게 해서 벌써 몇해가 지나가버린 거죠.

여러 작품을 쓰면서 느낀 것은, 괴테가 말하는 사랑이나 김삿갓이 말하는 사랑이 말로는 같은 사랑이지만은 다 다른 겁니다. 또 가장 초보적인 이야기지마는, 작가는 언제든지 자기세계를 고수하지 않고는 작품다운 작품을 쓸 수 없다. 그것이 그 작가를 특성짓게 하고 그 작품을 빼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작가들은 구조적인 모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작가와 업자 어느 한쪽을 잘못이라 하기는 어렵고 함수같이 복합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거죠. 작가가 작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은 영화법 같은 것을 개정해 가지고 자기 인력에 맞는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는 풍토, 요건, 기틀을 조성해주는 것. 그 일이 우선 문제다 보는 겁니다.

그래도, 나는 타협할 수가 없다는 거죠. 나도 배가 고프고 내 자식들도 잘 가르치고 싶지마는,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과 타협을 하고 굴복을 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더라 그거예요. 그러니까 아무 작품이나 주는 대로 맡아서 쓸 수 없더라는 결론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그 길은 더 괴롭고 고통스럽고 고독하고 어두울 수밖에 없죠. 정리 김경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영일출판프로젝트 연구원 netrin@orgio.com이 기록은 고 이영일 선생이 남긴 귀중한 자료인 원로영화인 녹취테이프를 소장 영화학도들이 풀어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