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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티셔츠의 노예

이게 다 <청춘 스케치>의 위노나 라이더 때문이지

내 출근 시간은 평균 10시45분. 늦잠을 자냐고? 믿기 힘들겠지만 대개는 7시면 눈이 떠진다. 집에서 회사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40분 내외. 그럼 출근 전 3시간 동안 대체 뭘 하냐고?

아침에 일어나 눈도 뜨지 못한 채 샤워를 한다. 옷장을 연다. 옷장 속에는 흰색 티셔츠가 서른장쯤 들어 있다. 남들이 보면 다 똑같다고 할 그 서른장의 티셔츠 속에서 용케 그날의 기분에 맞는 티셔츠 하나를 고른다. 입고 거울 앞에 서보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벗는다. 다른 티셔츠를 입어본다. 다시 벗는다(같은 과정을 세번쯤 반복). 잠시 다른 일을 하며 머리를 비우고 나면 그날의 기분에 딱 맞는 티셔츠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냉장고로 가 빵과 과일 등으로 배를 채운다. 배가 불러올 때쯤 되면 이미 오래전에 출근 시간이 지나버렸다는 사실, 그리고 나의 상사는 출근 시간에 특히 호랑이로 돌변한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나는 헐레벌떡 방으로 뛰어가 방금 전 입었다 팽개친 티셔츠 더미에서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티셔츠 하나(대개는 아침에 일어나 맨 처음 입었던 티셔츠)를 골라 입고 집을 나선다. 아니나 다를까, 회사에 도착하면 도끼눈을 한 상사가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지른다. “일찍일찍 안 다녀? 그나저나 넌 어떻게 된 지지배가 옷도 안 갈아입고 다니냐!”

변명하자면 이게 다 위노나 라이더 때문이다. 영화 <청춘 스케치>의 후반부, 바에서 단짝 친구와 맥주를 마시다 비행기표를 들고 나타난 마이클에게 놀람과 곤란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던 그녀(와 낡은 회색 티셔츠), 침대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와 붉은색 티셔츠), 동전 세탁기에 빨래를 넣다가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그녀(와 초록색 티셔츠)!

<청춘 스케치>에서 위노나 라이더는 티셔츠가 그냥 티셔츠가 아님을 증명해 보인다. 티셔츠는 그 자체로 간단하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아이템이지만 자기 몸에 맞는 걸 제대로 찾아내면 네크라인이 적당히 늘어진 걸 잘만 고르면 데이트를 위해 애써 차려입은 빈티지 드레스보다 섹시할 수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내는 것이다.

티셔츠는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다 다르다. 같은 디자인의 티셔츠라도 몇번을 세탁했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목선이 얼마나 늘어졌느냐에 따라 또 다르다. 입은 사람이 그걸 입고 어떤 자세, 어떤 표정을 짓느냐에 따라서도 느낌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러니 100장의 티셔츠를 갖고 있어도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없을 수도, 어제 100%의 티셔츠라 믿었던 티셔츠가 하루아침에 꼴도 보기 싫은 티셔츠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티셔츠를 ‘간지’나게 입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심한 태도’에 있다고 확신하는 나는 나를 향해 소리치는 상사에게 변명 따위 하지 않는다. ‘짝다리’를 짚고 선 채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그러다 30초면 끝날 호통이 종종 30분으로 연장되기도 하지만 뭐 어쩌겠나. 나는 이미 티셔츠의 노예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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