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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1-08-05

‘아레스토 모멘툼’과 정지상태의 변증법

<해리 포터>에 나오는 주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아레스토 모멘툼’. 이 주문은 어떤 언어에도 속하지 않는 가짜 문장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거기에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레스토’는 라틴어의 ‘머물다’(resto), 불어의 ‘멈추다’(arreter), 영어의 ‘체포하다’(arrest) 등 일군의 동사를 연상시킨다. 라틴어로 ‘운동’이나 ‘동작’을 의미하는 모멘툼(momentum)은 영어, 독어, 불어에서는 ‘순간’(moment)을 뜻한다. 따라서 ‘아레스토 모멘툼’은 ‘동작(이나 순간)을 멈춘다’는 뜻을 갖게 된다.

파우스트의 계약과 쾌락살인

그 주문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를 연상시킨다. 거기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치명적인 계약을 맺는다. 그 계약의 결과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으로 원하는 그 어떤 일이라도 체험할 권능을 얻으나 그 대가로 때가 되면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내놓아야 한다. 그 ‘때’가 언제일까?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순간을 향해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라고 말할 때. 그때 그대는 나를 결박해도 좋고, 그때 나는 기꺼이 나락으로 떨어지리라.”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멈추고 싶은 그 순간은 아마도 생애 최고의 열락의 상태일 것이다. 그 순간을 체험할 때까지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체험한 이후에는 반대로 파우스트가 영원히 메피스토펠레스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문화에서 영혼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영생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파우스트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인간에게 선사한 가장 기쁜 소식마저 포기하면서까지 체험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어떤 ‘순간’이었을까?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파우스트는 순결한 그레첸과 사랑을 맛보고, 미의 의인화인 트로이의 헬렌에게서 자식을 얻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그 ‘순간’을 가져다준 것은 사랑도 아니고, 미도 아니고, 인류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 결심이었다. 공동체를 위해 간척사업을 이룩한 이후에 만족한 늙은 파우스트는 비로소 순간을 향해 외친다.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약속대로 메피스토펠레스가 그의 영혼을 거두려는 순간, 신이 그의 손에서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한다.

<파우스트>가 그런 ‘순간’의 가장 이상주의적(idealist) 버전을 대표한다면 그와 대극을 이루는 가장 유물론적인(materilaist) ‘순간’은 영화 <감각의 제국>에 등장하는 버전일 것이다. 거기서 두 남녀는 쾌락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사 중에 끈으로 목을 조르는 장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내(이시다 키치조 역)는 여인(아베 사다 역)에게 끝까지 목을 졸라달라고 부탁한다. 파우스트가 최고의 정신적 열락의 순간에 제 영혼을 포기한다면 키치조는 최고의 육체적 쾌락의 순간에 제 신체를 포기한다.

그 이후의 얘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사다는 키치조를 목 졸라 죽인 뒤 칼로 그의 성기를 베어낸다. 이렇게 파트너의 성기를 도려내는 것은 ‘쾌락살인’(Lustmord)에 흔히 동반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사다는 키치조의 잘린 성기에서 흘러나온 피로 제 가슴에 “사다, 키치 우리 둘은 영원히”라고 써넣는다. 키치조가 생명을 끊음으로써 오르가슴의 순간을 영속화하려 했다면 사다는 키치조의 존재를 정지시킴으로써 둘의 사랑을 영원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것이다.

영화는 1930년대에 일본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같은 사건을 다룬 또 다른 영화에서 실제 사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지극히 평범한 외모로, 재판을 받으러 법정에 들어가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며 구경꾼들에게 환한 웃음을 던지고 있었다. 극단성을 선호하는 특유의 유미주의적 취향 때문일까? 당시 일본사회에서는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이 변태성욕자가 사랑의 극한을 추구하고 실천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결정적 순간

“멈추어라! 너는 너무나 아름답도다!” 이 대사는 종종 사진예술의 모토로 사용된다. 사진이야말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간을 멈추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회화로도- 가령 인상주의자들처럼-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상태를 기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순간적 인상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화폭 위로 옮기는 데에는 비교적 오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반면 사진은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그 짧은 순간을 필름 위에 고정시킨다. 사진 속에 응고된 순간들은 영원성에 도달한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사진의 본질을 ‘결정적 순간’(decisive moment)에서 찾았다. “결정적 순간. 그것은 어떤 사건의 중요성을 찰나에 동시적으로 지각하는 것이자, 그 사건에 적절한 표현을 주는 형태들을 정밀하게 조직하는 것이다.” 사진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제재가 아니라 순간이다. “사진에서는 가장 작은 것도 위대한 제재일 수 있다. 작은 인간의 디테일도 주도적 모티브(leitmotif)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작은 것이 위대해지는 순간, 디테일이 중요해지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은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다. 기나긴 기다림 끝에 도래한 그 순간에 셔터를 누르는 것은 영화에서 해리가 ‘아레스토 모멘툼’이라 외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주문은 추락하는 몸이 땅에 닿기 직전에 외쳐야 한다. 촬영의 결과도 주문의 효과와 다르지 않다. 그의 사진에서 고인 빗물을 살짝 뛰어넘는 사내의 신체는 허공에 떠 있다. 멈춘 것은 그의 신체만이 아니다. 카메라가 아니라면 흘러가버렸을 그의 그림자 역시 바닥에 고인 빗물 속에 얼음처럼 응고된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우리의 ‘아레스토 모멘툼’이었다. 이 주문은 신기하게도 움직이는 아이들을 그 자리에 응고시킨다. 실제로 이 주문을 외치고 뒤를 돌아보면 시시각각 접근하는 아이들의 형세가 마치 별자리처럼 일목요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베냐민이 말한 ‘정지상태의 변증법’은 이 놀이를 닮은 게 아닐까? “이미지란 과거에 있었던 것이 현재와 섬광처럼 한순간에 만나 하나의 별자리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이미지는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다.”

정지상태의 변증법

여기서 베냐민이 말하는 ‘이미지’란 아마도 역사적 스냅사진 혹은 영화의 정지장면을 가리킬 것이다. 철학에서 ‘변증법’이란 본래 운동과 발전의 논리를 의미한다. 하지만 베냐민의 변증법은 시간을 정지시킨 채 과거의 고립된 디테일들로 짜인 별자리 속에서 역사의 진리를 관상학적으로 해독해내려 한다. 여기에는 역사에 대한 완전히 다른 철학이 들어 있다. 즉 ‘정지상태의 변증법’ 속에서 역사는 더이상 선형적인 텍스트가 아니라, 비선형적으로 해독되는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게 너무 신비주의적이라면 좀더 세속적인 예를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범죄수사나 스포츠 중계에서는 순식간에 흘러가버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촬영된 동영상을 한컷 한컷 정지시켜 해독해나가곤 한다. 베냐민의 발상은 이 기술복제의 관행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역사를 선형적 흐름에서 꺼내어 중단시킬 때, 과거의 사건들이 갑자기 별자리를 이루면서 마치 섬광처럼 우리에게 현재와 관련된 진리를 계시한다. ‘순간아, 멈추어라’는 새로운 인식의 원리가 된다. ‘세속적 계시’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