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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객잔] 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는 이상한 파국

<고지전>이 이데올로기 프레임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이유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악어부대의 외상적 사건으로 제시된 포항 장면에서 문득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그는 유사한 상황을 예로 들어 진보와 보수간의 차이를 언급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전쟁터가 아닌 일반 버스로 순화된 가정을 했지만, 어쨌든 상황은 비슷하다. 만원 버스다. 그런데 버스 바깥에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때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 타고 가자, 라고 말하면 진보고, 더 탈 곳이 없으니 그냥 출발하자, 라고 말하면 보수가 아니겠냐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누군가가 이런 설명을 하는 그에게 만약 (<고지전>의 포항신에 등장하는) 전장의 극단적 상황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했다고. 달변이었던 그 역시 쉽게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문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봉쇄된 상황에서 어떤 행위의 정치적, 윤리적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은 부질없는 짓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유와 <고지전>의 포항에서의 사건간의 차이는 버스에 올라탄 이들에게 ‘선택을 위한 틈’을 열어두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내가 포항 사건을 거론하는 이유는 ‘악어부대의 행위를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지만 악어부대의 행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이 장면의 옳고 그름마저 거론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나는 이 장면이 그리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존 법칙의 프레임으로 본 한국전쟁

악어부대의 대원들은 오직 살기 위해 싸운다. 그들에게는 기존의 한국전쟁 영화의 프레임이었던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 따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역사적 사실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이는 전쟁의 발발 과정을 생략한 채 그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휴전 협정을 위해 지도 위의 펜들이 다투는 동안, 또 다른 한쪽의 누군가는 펜대가 지나치는 그 자리에서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 그것도 2년에 가까운 시간을. 북한군 장교 현정윤(류승룡)이 대변하듯,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일상화된 전투에 길들여진 자들이 전쟁의 이유마저 잊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고지전>이 기존의 한국전쟁 영화에 비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받는 것 중 하나는 이 지점에 있다. 이데올로기와 민족주의의 가면을 벗어던진 채로 전쟁 그 자체의 얼굴을 보여주려 한다는 것.

지금까지 한국전쟁 영화에서 <고지전>처럼 자신이 살기 위해 전우를 죽이는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역할은 인민군의 몫이었고, 이를 통해 그들의 비인간적 면모를 부각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국군에게 옮겨왔을 때, 우리는 그들의 비인간적 면모보다 그러한 상황까지 몰고 간 전쟁의 잔혹성에 더 초점을 두고 이를 바라보려 한다. 그렇다면 <고지전>이 이데올로기적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영화적 상상력의 근간은 무엇인가? <고지전>은 이데올로기 대신 ‘생존 법칙’을 그 자리에 앉힌다. 장훈이 관객에게 원하는 것은 이 생존 법칙을 프레임으로 해서 전쟁을 가치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고지전>은 가해자를 희생자로 연민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을 만든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하는 장면이 바로 포항에서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지 생존을 위한 행위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악어부대 대원들의 현재를 설명(또는 합리화)하는 일종의 기원 서사다.

우리가 이 장면에서 악어부대 대원들을 섣불리 가해자라 칭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가해자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또 다른 희생자처럼 비쳐지기 때문이다. <고지전>은 가해자 위에 전쟁이라는 더 가혹한 가해자를 배치해놓고, 살기 위해 동료를 죽이는 행위에 면죄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것이 전투 현장에서의 잔인한 생존 법칙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는 생존 법칙에 따르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포항에서의 행위를 이처럼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은 윤리적 판단이 불가능한 생존 법칙의 프레임으로 이 전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인간을 그런 상황에 직면하게 하는 전쟁의 잔혹성이 드러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고지전>이 반전영화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옥의 경험과 그들의 전쟁기계 같은 전투 모습이 너무도 단선적인 인과관계로 붙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그들의 ‘선택적 행위’마저 전쟁의 잔혹함이라는 외상적 사건의 책임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다는 의미기도 하다. 실제로 남성식(이다윗)을 죽도록 내버려두는, 아니 2초를 발견하기 위한 미끼로 활용하는 김수혁(고수)의 냉혹함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그 자신이 선택한 문제다. 그런데 김수혁의 논리를 따른다면, 이는 포항에서의 지옥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지전>은 전쟁이라는 죄는 있는데 (그것을 책임질) 죄인은 없는 이상한 파국의 결과를 보여준다. 이마저도, 전쟁이란 게 원래 그렇기 때문일까?

괴물의 시대, 파국의 내러티브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 법칙의 문제나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인물의 이야기는 200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영화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지금의 한국영화는 파국의 서사가 만연해 있고, 그 앞에서 모든 것을 잃은 인물의 절망을 목격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고지전> 역시 생존 법칙이 지배하는 전쟁터에서 전쟁이라는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러한 경향에 편승해 있다. <고지전>을 이러한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 속에 위치시킨다 했을 때, 우리는 이 포항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고지전>은 현 시대의 생존에 얽힌 문제를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 속에 펼쳐 보인다. 그것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 상상과 허구의 문제다. 달리 말해, <고지전>의 생존 법칙은 역사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상상과 허구의 영역에서 필요로 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상상과 허구는 (영화 속) 역사를 성립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고지전>이 한국전쟁에 대한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윤리적 판단을 배제한 채 한국전쟁의 역사 속으로 관객을 초대한다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프레임으로 전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은 창작자의 선택 문제니까 말이다(물론 이는 중요한 비평적 대상이어야 한다). 정작 문제는 <고지전>이 한국전쟁을 생존 법칙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려 할 때, 그로 인해 새롭게 제기되는 이데올로기, 정치, 윤리 등과 관련해 어떠한 영화적 태도를 취하는가에 있다. <고지전>은 판단을 압도하는 외상적 상황을 보여준 뒤, 전장에서의 생존 법칙은 그러한 판단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전쟁은 가장 나쁜 것이라는 자명한 논리의 반복을 위해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문제에 눈감아버리는 이데올로기적 봉쇄의 태도가 아닌가?

<고지전>의 이러한 특성을 최근의 한국영화의 경향과 관련짓는다면, 이는 자신이 직면한 재난의 원인을 깨닫지 못한 채 서사의 종결을 맞는 인물들의 경향과 맞닿아 있는 듯하다. 강은표(신하균)는 모두가 죽어버린 생존 법칙의 허망한 결말만 목격한다. 애초에 그의 역할은 관객과 악어부대(또는 애록고지 전투)를 매개하는 목격자였고, 끝까지 그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김수혁과 강은표를 포함한 최근 한국영화의 많은 인물들은 재난과 그 파국의 원인을 감히 알려 하지 않는다. 열심히 싸우지만, 원인을 외면한 채 그 결과에만 죽자고 달려드는 사태의 반복. 그 결과는 북한군 장교 현정윤의 허망한 자기 고백이 들려준다. <고지전>은 역사의 옷을 입은 현재의 상황을 통해 미래를 불안하게 바라보는 영화다. 영화 속 그 누구도 전쟁 이후를 꿈꾸지 않는다. 어쩌면 현정윤이 전쟁에서 잃어버린 것은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신념이 아니라, 그것이 일굴 수 있으리라 믿었던 미래에 대한 꿈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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