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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아이콘] 낯설면서도 친숙한
진중권(문화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정원교 2011-08-19

시적 언어와 ‘낯설게 하기’

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이른바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를 일상 언어와 구별되는 시적 언어의 특성으로 꼽은 바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시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사용되는 일상의 언어와는 다르다. 시는 우리의 일상 언어를 낯선 방식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각운이나 두운, 동일한 어구의 반복, 의미론적 혹은 통사론적으로 불합리한 단어의 결합 등을 통해 우리는 어떤 텍스트가 시인지 아닌지 어렵지 않게 구별해낸다.

자동화한 지각의 익숙함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 속의 한 구절이다. 일상에서 언어를 이렇게 이상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시어 특유의 낯설게 하기다. 낯설게 하기는 자동화를 파괴함으로써 낡은 지각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나비가 바다에 내려앉으려다 날개만 물에 적시고 다시 날아오르는,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일상의 사건을 시인은 이렇게 색다르게 체험하게 해준다.

시가 언어를 낯설게 만드는 것은 이른바 일상 언어의 ‘자동화’를 파기하기 위해서다. 일상의 소통에서 언어 자체는 투명해진다. 그때 우리는 언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 안에 실린 정보에만 주목하게 된다. 일상 언어를 통한 소통은 이렇게 ‘자동화’되어 있다. 시는 이 자동화를 파괴한다. 가령 이상의 시의 제목이 ‘조감도’였다면 그 낱말은 투명해졌을 것이다. 제목이 한자의 획 하나를 뺀 <오감도>이기에 우리는 그 낱말 자체에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낯설게 하기’도 일상 언어에 받아들여지면 곧 자동화되어 더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속담’은 한때 은유였던 것이 일상 언어로 들어와 한갓 관용어구로 굳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주 어린 시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을 처음 듣고 방을 데굴데굴 굴렀던 기억이 난다. 물론 어른들에게 이는 이미 ‘죽은’ 은유에 불과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표현이 처음 우리 언어에 들어왔을 때에는 매우 신선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ct) 역시 일종의 ‘낯설게 하기’라 할 수 있다. 브레히트는 1935년 모스크바에서 메이란팡(梅蘭芳)의 경극을 관람한 뒤 이른바 서사극의 원리를 지칭하는 데에 빅토르 슈클로프스키의 용어를 차용했다. 소격효과의 의미는 학자마자 다양하게 해석된다. 그 낱말이 영어로 ‘소외’, ‘거리두기’, ‘탈친숙화’, ‘다르게 하기’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것은, 소격효과의 본질에 대한 다양한 해석 차이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리라.

브레히트의 눈에는 아마도 중국의 경극이 매우 낯설게 보였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서구 연극의 관습을 전복시키는 새로운 연극, 이른바 ‘반(反)아리스토텔레스’ 연극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가 ‘서사극’이라 부른 이 새로운 연극의 요체는, 몰입을 방해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극중 현실에 늘 비판적 거리를 취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이는 물론 관객이 몰입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 속으로 자연스레 함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몰입을 깨기 위해 브레히트는 종종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게 만든다. 가령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극의 말미에, 배우가 몸을 돌려 관객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배우가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 때, 극이 제공하던 환영은 깨지고 관객은 극 속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받는다. 몇몇 학자들이 ‘소격’을 종종 ‘거리두기’로 번역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소격효과를 곧바로 특정한 극적 장치와 동일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맥락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무엇보다도 친숙함을 통해 작동한다는 사실이다. 가령 한국에서는 왜 길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성을 보기가 힘들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이 익숙한 풍경 속에 이미 지배 이데올로기가 들어와 있다. 이 익숙함을 ‘낯설게’ 제시할 때, 관객은 비로소 자신의 무의식을 지배해온 지배 이데올로기의 존재에 주목하게 된다.

일상의 경이

초현실주의에서 ‘낯설게 하기’ 기법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 불린다. 데페이즈망은 ‘하나의 사물을 그것이 속하는 익숙한 환경에서 떼어내 낯선 곳에 집어넣는 것’을 말한다.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이라는 로트레아몽의 시구는 데페이즈망의 전형적 사례다. 어떤 의미에서 뒤샹의 <샘> 역시 일종의 데페이즈망으로 볼 수 있다. 변기를 익숙한 맥락(화장실)에서 떼어내어 미술관이라는 엉뚱한 환경으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은 일상에서 ‘경이’(le merveilleux)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마그리트의 작품에 묘사된 대상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결합될 때, 가령 우산 꼭대기 위에 놓인 물 잔(<헤겔의 방학>)처럼 뭔가 기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렇게 일상적인 것 속의 몽상적인 것을 드러낼 때, 꿈과 현실이 중첩된 새로운 현실, 즉 ‘초현실’이 탄생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낯설게 하기’를 언어(詩語)의 효과로 이해했다면 초현실주의자들은 ‘낯설게 하기’를 무엇보다 사물의 효과로 이해했다.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은 경이의 효과를 연출하는 데 주로 오브제를 사용했다. 초현실주의 오브제들, 가령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용도를 알 수 없는 마스크, 해변에서 우연히 발견한 부목(浮木), 그라모폰의 스피커와 마네킹 다리의 결합 같은 것은 낱말이 아닌 사물로 이루어진 시(詩)라 할 수 있다.

친숙한 낯섦

브레히트는 소격효과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의 이데올로기를 낯선 것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데페이즈망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을 낯선 것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든, 무의식적으로 지나치던 대상 속의 감추어진 경이로움이든, 무의식을 의식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둘은 상통한다. 베냐민이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인식적 기능에 주목한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관점에서 초현실주의적 ‘경이’는 ‘섬뜩함’(uncanny)의 효과로 설명된다. 그 유명한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섬뜩함’(unheimlich)을 ‘친숙한 낯섦’으로 정의했다. ‘낯섦’과 ‘친숙’은 논리적으로 서로 배제하나, 이 정의 속에서 서로 반대되는 두 개념은 모순적으로 결합된다. 논리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두 요소가 서로 결합하는 것은 불가해한 현상이다. 그러니 거기서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섬뜩함의 느낌이 발생하는 것이리라.

프로이트에 따르면 한때 친숙했으나 억압을 통해 망각된 욕망이 다시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낯설면서도 어딘지 친숙하게 느낀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때 무생물이었으나 탄생과 더불어 그 사실은 억압되고 망각된다. 하지만 억압되고 망각된다고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내면에는 여전히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은밀한 충동이 존재한다. 한때 친숙했으나 이제는 낯설어진 그 충동은 우리에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