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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죽음을 예술로 승화하다

필리핀 감독 로리스 길렌과 두딸이 남편-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영화 <마스카라>

최근 뛰어난 독립영화작가들의 배출로 주목받고 있는 필리핀에서 여성감독의 존재는 미미하다. 마릴로 디아즈 아바야, 로리스 길렌 정도가 국제적으로 알려진 필리핀의 여성감독이다. 두 사람은 모두 연기자 출신에다 제작자, 작가이며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다. 마릴로 디아즈 아바야는 2007년에 마릴로 디아즈 아바야 영화연구소/예술센터를 설립해 후학을 양성하고 있고, 로리스 길렌은 시네말라야영화재단의 부이사장직을 맡아 필리핀 독립영화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로리스 길렌은 시네말라야영화재단의 부이사장직을 맡고 있으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매우 의미있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마스카라>가 바로 그것. <마스카라>는 자신과 고인이 된 남편 조니 델가도에 관한 작품이다. 필리핀의 존경받는 배우였던 조니 델가도는 2009년 병환으로 타계하였다. 2년이 지난 뒤, 로리스 길렌은 남편이 타계한 직후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기로 했고, 모든 과정을 두딸과 함께했다. 두딸인 이나 펠리오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배우이며, 아나 펠리오는 제작자로 이번 작품에 참여하였다. 시나리오는 로리스 길렌과 이나 펠리오(필명 이리나 펠리오)가 함께 썼다. 세 모녀가 힘을 모아 <마스카라>를 만든 것이다.

영화는 병환으로 타계한 배우 로베르토의 아내 엘린이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편지 한장을 발견하게 되고, 그 편지를 통해 로베르토의 숨겨진 딸 안나의 존재를 알게 된 뒤 그녀를 만나러 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현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버무리면서 남편을 잃은 아내가 숨겨진 딸과 만나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다(영화 속의 숨겨진 딸 안나 역은 이나 펠리오가 맡고 있다). 로리스 길렌은 필리핀의 영화인들이 남편의 생전 모습을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사실 이 작품은 시네말라야영화재단의 지원을 받은 독립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거물급 배우들이 이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 방식은 이러하다. 리키 다바오, 안젤리카 판가니반, 마크 길, 리자 로레나, 파니 세라노 등 저명한 배우들이 로베르토의 장례식이 끝난 뒤 엘린의 집에 모여 생전의 로베르토가 얼마나 훌륭한 배우였고, 다정한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한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로리스 길렌의 남편 조니 델가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로리스 길렌이 조니 델가도를 너무 미화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평가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로리스 길렌과 조니 델가도의 실제 삶은 영화 <마스카라>보다도 훨씬 더 치열했고, 극적이었다. 로리스 길렌은 비록 남편에 관한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냈지만 최대한 자신을 억눌렀던 것이다. 남편 조니 델가도에게는 실제로 숨겨둔 딸이 있었다. 외할머니 손에 자라난 그녀는 공산반군이 되어 산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조니 델가도는 직접 딸을 찾아 나섰고, 결국 그녀를 되찾아왔다. 하지만 부녀는 왕래없이 떨어져 살았고, 임종 직전 로리스 길렌은 그녀를 찾아 남편의 임종을 맞게 했다. 조니 델가도는 딸을 만난 직후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세 모녀는 실제 그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극적인 요소를 모두 거둬내고,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아버지에 관한 사랑과 추억을 담아낸다. 특히,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이복동생인 안나 역을 맡아 엘린과 만나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이나 펠리오의 연기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이런 역을 할 수 있는 배우가 얼마나 될까? 이 작품에 대한 비평적 평가는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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