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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범] “<생활의 발견>의 소주, 가장 기억에 남네”
이영진 사진 최성열 2011-09-02

극장 개봉하는 방송 다큐멘터리 <술에 대하여> 연출한 임범 감독

임범 PD는 <한겨레> 기자 출신이다. 1989년에 입사해 2006년까지 기자로 일했다. 90년대 말부터 영화기자로 일했고, 중간에 <씨네21> 취재팀장을 맡기도 했다. 그가 쓴 영화에 대한 글은 좀 독특했다. 정곡을 찌를 때도 촌스럽게 덤벼들지 않았고, 에둘러 가면서도 사소한 변별점을 포착해냈다. 그때 이미 애주가로서도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가 아니었다면 폭탄주의 황금비율이나 소맥의 맛이 <씨네21>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그는 술 못 마시는 여자 후배들을 위해서 양주잔에 미니 폭탄주를 제조하는 재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프로듀서 하겠다고 영화판으로 떠난 지 5년이 됐다. 영화인이 되겠다고 떠났지만, 어찌된 일인지 술꾼으로 더 유명해졌다. 술 칼럼을 쓰고, 술에 관한 책을 내고, 급기야 술에 관한 다큐멘터리까지 만들었다. 9월1일 개봉하는 <술에 대하여>는 그가 직접 구성하고 연출한 방송다큐멘터리다. 방영되지 못한 30분을 더해 극장 상영용으로 만들었는데, 술을 통해 한국인의 삶과 문화의 변동을 읽어내는 흥미로운 기록이다. 친구들과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온 날, 술집에서 술꾼 임범을 만났다.

-최근 몇년 동안 술로 먹고산 셈이다. =영화가 잘 안되니까 술쪽으로 풀리더라. 2006년에 기자 그만두고 아이필름에 가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지지부진했다. 돈은 벌어야 할 것 같아서 <중앙선데이>에 ‘임범의 씨네알콜’이란 칼럼을 썼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그 뒤로 <한겨레21>에 ‘내가 만난 술꾼’을 연재할 때는 아예 애주가라고 소개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다. 술에 대한 강의 해달라고.

-술 강의 해달라는 곳도 있나. =OO청 등에서 많이 들어왔다. 공공기관 장들이 정부부처에서 차관이나 국장 하다가 나간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은 아무래도 술로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많으니까.

-예전에 후배들에게 소주 사주면서 위스키 종류와 제조법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그랬나. 남들보다 조금 더 알았을 뿐이다. 술을 워낙 많이 마셨으니까. 많이 마시면 맛을 알게 된다. 덧붙일 지식이야 찾아보면 되는 것이고.

-<술에 대하여>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 =예전에 같이 검찰 출입하던 MBC 기자가 소개했던 모양인데. 영화판에 있고, 시나리오도 쓴다고 하고, 시간도 많을 것 같고. 뭐 그래서 귀띔해줬던 모양이다. CP까지 포함해서 5명이 우르르 몰려와서 술 왕창 마시고, 마지막에 ‘같이 하십시다’ 그러더라고. 술에 관한 아이템도 있다면서.

-다른 아이템엔 관심이 없었나. =연애변천사나 애국심쪽에도 관심이 있긴 했는데. 외부 연출자가 시청자한테 설득력을 가지려면 책이라도 한권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술을 소재로 하는 게 낫겠구나 싶었다.

-부제를 붙이면, 술을 통해 본 한국사회 변천사 정도가 될 것 같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면 이전의 다큐멘터리와 변별점이 없을 것 같았다. 한국의 전통주, 뭐 이런 식의 접근인데 별로 재미가 없고. 그래서 구상 끝에 우리가 50년 동안 왜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시면 어떤 기분이었고, 또 술자리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다 쪽으로 맞추었다. 시작 단계에는 말술 마시는 주당들의 일화도 많이 담으려고 했는데 취재가 잘 안되더라. 술 좋아한다는 사람들도 카메라 앞에서는 그렇게 보이는 걸 무척 꺼려했다. 박희태 국회의장의 경우, 본인은 인터뷰하겠다고 했는데 주위에서 만류했는지 결국 번복했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폭탄주로 유명한데. =폭탄주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다. 당연히 박 의장을 떠올렸는데, 취재 과정에서 그가 춘천지검장으로 있었던 1984년에 지역 유지들과의 모임에서 처음으로 폭탄주를 마시게 됐고, 그 해 전국검사장회의 회식 자리에서 술잔을 돌린 것이 폭탄주의 시초가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 의장이 출연한다고 할 때만 해도 업됐지. 역사적인 증언이잖아. 나중에 사실 확인이라도 하려고 하다 본인이 직접 나오는 게 아니면 재미가 없겠다 싶어서 그만뒀다. 인터뷰를 결국 고사한 인사들이 몇 명 더 있다. 여전히 한국사회에 쓸데없는 엄숙주의가 있는 것 같다.

-국내에서 양주가 본격적으로 소비된 시점이 1980년대 후반이다. =한겨레에 1989년 입사했는데, 검찰 출입하면서 위스키 엄청 마셨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 회사에서는 폭탄주를 안 마셨다. 군인, 정치인, 검찰 정도가 마셨던 건데, 폭탄주는 그들끼리만 즐기는 특별한 세리머니였다.

-그 의식을 즐겼나. =싫지. 비린내 나고 맛대가리도 없고. 그래도 취재원들하고 어울려야 하니까 먹었는데. 알겠지만, 폭탄주 도는 술자리에선 대화가 거의 없다. 기자야 검사한테 무슨 말이라도 듣고 싶은데 검사 입장에선 말 많이 해봤자 손해니까 계속 잔을 돌리는 거지. 정보는 흘려선 안되고, 우의는 다져야 하고. 그러다 조폐공사 파업 유도 발언처럼 대형사고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술에 대하여>는 TV 방영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런 이유로 다루지 못한 주제가 있을 텐데. =예술인들에게 술이 그만큼 절박했던 이유를 더 담고 싶었는데 결국 뺐다. 알코올 중독쪽으로 들어가볼까 했는데 본인들이 말을 안 해주는 문제도 있었고, 지상파 방송라는 점도 좀 걸리고.

-81학번이다. 초반에 81학번 운동권 출신들의 술자리를 찍었다. =그 장면을 넣은 게 유용한 건지 잘 모르겠다. 술과 젊음이라는 챕터를 만들면서 이른바 386세대가 과거 세대의 젊음까지도 상징할 수 있을 것 같아 친구들에게 부탁했는데. 굳이 따로 이런 말 좀 해달라고 연출한 것은 아니고. 그런데 아직도 학생운동이니 운동권이니 하면 맥락과 상관없이 튀어 보인다. 배경음악으로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깔아왔기에 일부러 고고장에서 나올 법한 몽키스 음악으로 바꿔달라 했던 것도 그런 이유다. 그 시대의 울분을 이야기하려고 한 건 아니고 그 시대를 세태의 한 장면으로서 제시하고 싶었다.

-일부러 연출하지 않았지만, 방송 시점 등의 한계들 때문에 외려 연출한 것처럼 느껴진다. 뒷이야기를 더 보여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힘들었다고 하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이 겪는 상황에 비하면 그때가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을 우리가 이렇게 방치해도 되는 것인가, 뭐 이런 걱정의 말들을 누가 해줬으면 하는 바람은 있었다.

-젊은이들의 술자리에서 격정과 낭만이 사라졌다고 했다. 본인의 대학 시절 술자리는 어땠는지 궁금하다. =술만 처먹으면 결국엔 울고 부수고 집어던지고 했지. 맺힌 게 많아 봤자 얼마나 많다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정치적 억압이 정서적 과잉의 핑계가 된 건데. 결국 그 취기로 거리에 나가서 싸웠던 것이고. 요즘은 그런 게 잘 안 보인다.

-그 시절에 술을 배웠는데도 큰소리 내거나 꼰대 짓은 잘 안 한다. 성격인가 의지인가. =젊을 때부터 술버릇이 별로 없다. 격해지는 경우도 어쩌다 몇 번이고. 사실 기분 안 좋으면 술 잘 안 마신다. 술이 위로가 안되니까. 마셔도 술이 겉돌아. 술자리에서 의식적으로 내 말 많이 하지 말고 후배들 이야기 듣도록 노력하자, 그러긴 하는데 나 혼자 떠들 때가 많다.

-시대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영화, 광고 장면 등을 재밌게 끼워 넣었다.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뭔가. =<생활의 발견>의 소주. 소주라는 게 관성적으로 어쩔 수 없이 먹는 술이다. 미각을 자극하지도 않고, 강렬한 향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무료하니까 지루하니까 목구멍으로 퍼 넣는 술이다. 홍상수 영화의 나른함, 극중 인텔리들의 면모와 소주가 잘 어울린다. 우리 삶의 리얼리티가 잘 묻어난다고 해야 하나. 사실 글 쓸 때도 그걸 쓰고 싶었으나 막상 소주에 대해 정색하고 쓰면 좋은 소리 못할 것 같아 그냥 피해갔는데 이번에 <생활의 발견>의 장면이 떠올라서 가져와 썼다.

-반응은 어떤가. 포스터 홍보문구에 ‘술 땡기는 다큐멘터리’라고 되어 있던데. =의외로 방송 보고 나서 술 끊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장선우 감독도 술 그만 마셔야겠다고 하더라. 극장에 걸기엔 너무 건전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촬영 때 너무 술 먹는 장면만 찍나 싶어 의식적으로 줄였는데 나중에 보니 별로 술 먹는 장면이 없더라.

-술을 끊은 적도 있나. =법조기자 5년 정도 하고 다른 부서로 옮긴 뒤에 신체검사를 했는데 지방간 수치가 250이 넘어서 한달 동안 안 마신 적이 있다. 한달 지나니 수치가 정상으로 떨어졌다. 아무래도 젊을 때니까. 그래서 맥주 한잔 마셨는데, 그전까지는 국산 맥주는 맛없다, 맛없다 그랬는데, 한 모금 마셨더니 천상의 음료구나 싶더라.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마시니까 그 맛을 몰랐던 거지.

-공동연출한 MBC 조승원 기자는 조주자격증도 갖고 있는 애주가던데. =365일 중에 350일은 술 마시는 친구다. 혼자서도 홀짝홀짝, 이 술 저 술 마시다가 기능사 자격증까지 땄다고 했다. 나도 필기는 붙었는데 실기를 아직 못 봤다. 50가지 칵테일 중에 지정한 3가지를 정해진 시간에 만들어야 하는 건데. 며칠 연습해서 딸 수 있는 건 아니라서 미뤄왔다.

-사람이 좋아서 술을 마시나, 술이 좋아서 사람을 만나나. 아무래도 전자일 것 같은데. 술로 맺은 인연들도 많고. =술 맛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이 들수록 빨리 알아보게 된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대단한 인생을 살았거나 대단히 매너가 좋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이상하게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취기를 같이 나누는 기분이 좋은 사람들이 있다.

-술이 연애에도 도움이 되나. =나랑 연애한 여자들은 다 술 잘 먹었다.

-영화기자 일을 그만둔 이유가 뭔가. =기자라는 게 남이 만들어놓은 걸 품평하는 사람인데, 남이 해놓은 걸 놓고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게 좀 지겨웠다. 게다가 나이 먹으니까 젊은 작가들이 불편해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데스크를 보기도 싫고. 뭐, 물론 좋은 글 쓰는 정성일, 허문영 같은 사람들은 있어야지. 그래서 이런저런 핑계 대고 나왔는데 영화가 잘 안되네. 루저적 동지애를 나눌 친구들이 많아서 좋긴 한데.

-차승재 대표와 함께 데뷔작을 준비 중이다. =기자가 주인공인 영화다. 스릴러적인 틀은 있지만 드라마에 가깝다. 결과물이 나와서 투자사에 돌리고 있다. 여러 개를 동시에 쓰기 시작했는데 아무래도 이건 디테일들을 따로 취재하지 않아도 되니까 손이 빠르더라고. 그래서 제일 먼저 썼다. 기자 그만두니까 취재하는 게 어찌나 귀찮던지. 이건 내가 아는 이야기니까 가공을 할 때도 자신이 붙었다.

-궁극적으로 제작하고 싶은 영화가 뭔가. =한국의 시스템을 배경으로 깐, 잘 짜인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다. 한국사회의 시스템이 오작동하는데 저런 데가 뚫리면 제대로 작동하겠구나, 아니면 저래서 제대로 안 돌아가는구나 하고 문제 제기할 수 있는 그런 영화. 그렇게 엮어야 드라마의 긴장이 배가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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